이상하고 아름다운 덕후의 나라
초6 내담자가 손에 뭔가를 소중하게 들고 상담실에 들어옵니다. 뭐냐고 물어보니 투바투 굿즈라고 하네요. 투바투는 빅히트 뮤직이 만든 5인조 다국적 보이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줄임말입니다. 이 여학생과는 1년 가까이 상담했는데 이렇게 밝은 표정은 처음 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을 많이 하지만 자신의 최애(제일 좋아하는 멤버)에 대해 말할 때는 수줍은 표정으로 묻지도 않은 것까지 세세하게 얘기해 줍니다. 몇 년 전 무기력 증 때문에 상담받으러 왔던 고3 친구도 좋아하는 아이돌 얘기를 할 때만큼은 표정에 생기가 돌았었죠.
청소년상담센터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아이돌 말고도 로블록스나 브롤스타즈 같이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게임에서부터 롤(리그 오브 레전드), 틱톡, 웹소설 등 요즘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뭐 하고 노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최애의 아이’ 같은 웹툰은 몇몇 내담자가 줄거리를 상세히 말해준 덕분에 직접 읽은 기분이 들 정도예요. 관심사에 대해 얘기하는 아이들의 표정은 반짝임의 강도를 최고로 높인 별처럼 빛이 납니다. 어찌나 진지하고 사랑스러운지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 짓게 되죠.
생각해 보면 저도 십 대 시절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히트곡을 줄줄 외웠고 노래를 하도 많이 들어서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날 지경이었어요. 플레이어에 테이프가 엉키기라도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죠. 연필이나 펜으로 엉켰던 테이프를 되감는 작업을 할 때면 거의 수술을 하는 집도의처럼 신중한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몇 년 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그룹 BTS와 뉴 키즈 온 더 블록 함께 찍은 사진을 봤는데요 그야말로 21세기 팝 아이콘과 전설의 만남이었죠. 내가 좋아하는 두 그룹 멤버들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기다니. 십 대 시절 나의 설렘이 묵은 먼지를 털고 뛰쳐나와 ‘오랜만이야. 나 아직 살아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깊은 밤을 따라서
너의 노랫소리가
한 걸음씩 두 걸음씩
붉은 아침을 데려와
새벽은 지나가고
저 달이 잠에 들면
함께했던 푸른빛이 사라져
(뷔, 네 시)
BTS를 좋아하게 된 건 어느 잠 못 들던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한 곡에서 시작됐어요. 새벽 두세 시쯤 깨어 있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감성 충만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대잖아요. 갑자기 이 세상에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공허하고 삶이 무채색 같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원래 저는 ‘창틀에 쌓인 먼지만 닦다가 죽는 건 아닐까’라는 말을 되뇌던 비관 주의자였어요, 하지만 살아 있으니까 감각을 총동원해 라디오를 듣고 새벽 공기를 마시고 고독에 침잠할 수 있네. 이런 깨달음이 외롭고 슬프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어요. 내일 일어나면 뷔가 속한 BTS라는 그룹의 노래를 찾아서 들어봐야지. 하고 싶은 게 생기다니 감사할 따름이네. 오랜만에 내일 할 일에 대한 기대가 생기더라고요.
다음 날부터 BTS의 뮤직비디오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가사의 의미나 세계관도 궁금해졌죠. 한창 방탄소년단을 덕질 중이던 친구 딸에게 7명 멤버의 이름과 특징을 상세히 들었어요. BTS의 노래를 들으면서 몸을 움직이니까 하기 싫던 집안일도 후다닥 해낼 수 있었죠.
BTS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BTS의 STUDY WITH ME를 켜 놓고 보고서를 썼습니다. 상담의 반은 사례 개념화와 보고서 쓰기, 워크숍, 스터디가 차지합니다만. 잡념이 팝업창처럼 떠오르는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저의 뇌를 음악만이 차분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상담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람 있지만 그만큼 외로운 직업을 선택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혼자 하는 조용한 덕질은 외로움으로부터 저를 구원해 줬습니다. 콘서트에 가거나 굿즈를 사는 건 아니었지만요.
사실 팬클럽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저처럼 혼자서 특정 가수의 노래를 즐겨 듣는 게 아니라 같은 대상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함께 하는데 덕질의 진정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몇 년 전 여름에 포레스텔라를 덕질하는 지인을 따라 공연에 간 적이 있었어요. 이 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나이, 직업, 사는 곳은 다 달랐지만 같은 가수를 좋아하고 응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마음과 눈빛은 모두가 소녀였죠.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굿즈와 음료수, 부채를 나눠주는 다정한 마음. 이 낯선 세상 속 소녀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 열정적이고도 순수하게 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함께 지방 공연을 보러 가서 그 지역을 함께 여행하고 맛 집을 찾아다니며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이,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소중한 사이가 되는 신기한 공동체. 이곳은 바로 이상하고 아름다운 덕후의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의 사전에는 혐오와 미움, 갈등, 양극단의 대립 같은 단어 대신 동경과 응원, 감동 같은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품은 단어만 존재할 것 같았어요.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 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최애의 약동하는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쫓으려고 춤추는 내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 우사미 린, 최애 타오르다
요즘에는 트로트 가수들도 K-POP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팬클럽 회원들의 다양한 연령대를 보면 덕질은 더 이상 젊은 층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중년이 돼서 생전처음으로 팬클럽 활동을 해본다는 사람도 덕질이 이제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의 원천이 됐다고 고백합니다.
덕질을 하면서 힘든 삶과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것에는 나이가 상관없습니다. 동경하는 대상과 정서적 연결감을 느끼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춤추는 열정을 보면서 심미적인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죠. 팬 커뮤니티에 참여하면서 단조로운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껴보는 것도 긍정적인 경험입니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나이를 불문하고 덕질은 분명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덕질에 관심이 없는 데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만 있고 이렇다 할 즐거운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해보고 싶었지만 미뤄뒀던 취미생활이나 동호회 활동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정체감도 생기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꼭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소소한 덕질이나 취미활동으로 하루치 기쁨을 충전하노라면 버티고 견디는 오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삶으로 변신할 겁니다. 뭔가에 흠뻑 몰입하는 경험은 누가 뭐 라건 간에 내 취향을 자존감과 정비례하게 만들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