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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든쌤 Sep 23. 2024

나에게 가장 못되게 군 건 바로 나였다

중년, 나를 재양육하는 시간 


이번 추석엔 날씨가 어찌나 무더운지 음식 만들고 청소 좀 했더니 기진맥진이었다. 갱년기라서 밤 낮 할 것 없이 후끈거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괴로운 노릇이다. 몸도 피곤하고 모처럼 연휴라 뒹굴 거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한편으로는 ‘시간 많을 때 뭐라도 해야지. 이렇게 게으르게 있으면 안 되지.’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읽고 싶은 책이 관내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더니 지역 백일장 공모전 팝업창이 떴다. 마침 주제가 평소 흥미 있던 것이라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결심, 노트북을 열고 A4 용지 반 정도 쓰자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갑자기 ‘이렇게 써서 되겠어?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백일장이야 말로 글쓰기 솜씨를 겨루는 대회 아니던가. 내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목표가 되자 쓰고 싶은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단 참여하지 않으면 실패를 겪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아직 잠재력이 있는 상태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돌이켜 보면 크고 작은 도전 앞에서 ‘어차피 네 실력으로 안 될 거야’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한 일이 많았다. 스스로 질책하고 평가 질 하는 목소리는 오랜 세월 나와 함께 해서 언제부터 생겼는지 기억도 아득하다. 


나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나누는 대화 속에는 어린 시절 양육자의 목소리나 주변과의 비교 등이 켜켜이 녹아 있다. 심리학 용어로 내사는 나의 진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들은 말이나 관점을 나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양육자가 비난하는 목소리를 자신의 초자아 속으로 Ctrl C + Ctrl V 하듯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민하고 진득하지 못한 나는 성장하면서 공부 잘하고 성실한 모범생 언니와 비교당할 때가 많았다. 언니와 같이 방을 쓰는데 옷걸이에 종종 언니 새 옷이 걸려 있었다. 언니와는 체격이나 몸무게가 비슷해서 옷을 물려 입을 수도 없었다. 엄마에게 왜 언니만 사주냐고 물어보면 첫째가 잘돼야 동생들도 잘 된다는 납득하기 힘든 대답을 하셨다. 어린 마음에 엄마는 언니만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년생인 우리 자매는 초중고를 같이 다녔는데 선생님들께도 ‘언니는 성적이 좋은데 넌 왜 이러냐’라는 식으로 비교하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점점 '뭘 하든 언니보다 못할 테니 그럴 바엔 아예 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반항심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쪽으로 작동한 셈이다.      


나는 나와 잘 지내는 법을 전혀 몰랐다. 잘 지내기는 커녕 나에게 가장 못되게 구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스스로에게 모진 말들을 쏟아부으며 비난하고 상처 주기 바쁜 자존감 뱀파이어 같은 존재랄까.  만날 때마다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거나 깎아내리는 친구가 있다면 거리를 두거나 만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 혹독한 잔소리꾼 같은 친구가 바로 나 자신이라서 24시간 내내 같이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한없이 위축되고 자기혐오에 빠진 내가 보였다. 




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의 저자 마이클 투히그 클라리사 옹은 자기비판을 연료로 사용하는 방식을 경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불필요한 고통을 과도하게 유발한다. 둘째 채찍을 사용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분노에 휩싸이고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만든다.


40대가 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습관적으로 나를 막 대하는 것을 멈추기로 결심했다. 가뜩이나 세상살이도 신산한데 내가 나에게 이렇게 못되게 구는 게 잔인하게 여겨졌다. 선택적으로 증거를 수집해서 내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시하고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맘추기로 했다. 

더 이상 과거의 경험을 탓하면서 불행한 현재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중년 이후 남은 생은 자신에게 친절한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천천히 마음의 습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 상처 주지 않는 습관’의 저자 김도연은 우리 뇌의 진정 시스템은 친절함을 느끼게 되면 침착해지면서 감정이 누그러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민감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대하는 마음이 온화하고 자애로울 때 마음 안에 안전한 내적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내가 나에게 좋은 부모가 돼 주자

만약 세네 살짜리 아이가 걸어오다가 내 앞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당신은 무릎이 까지고 아파서 엉엉 우는 아이를 외면하거나 일어나라고 다그치기보다는 다정한 말투로 괜찮으냐고 물어봐 줄 것이다. 넘어졌던 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속상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힘들거나 두려울 때 타인의 지지와 격려를 바라기에 앞서 나부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고 격려해 줄 필요가 있다.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 본 경험이 드물다면 지금부터라도 스스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자.


비록 부모님은 나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했지만 이제 어른이 된 내가 나의 부모가 되어 마음이 힘들거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를 따뜻하게 돌볼 수 있다. 울고 있는 내 마음속 아이의 슬픔과 외로움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속상했지, 이렇게 울고 싶을 정도로 많이 힘들었구나. 울고 싶은 만큼 여기서 편히 울어.’라며 따뜻하게 다독여 줄 수 있다.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의 저자 문요한은 자기 친절이 자기 비난과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통한 통합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표현이 잘못됐을 뿐 자기 비난의 마음 또한 나의 일부이고 자기 친절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자기 비난의 목소리 안에도 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비난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자기 비난을 끌어안고 그 의도와 표현을 일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동적으로 '난 부족해'라는 목소리(자기 비난)가 떠오를 때 내가 나에게 '난 부족해'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차리고(자기 관찰) 그 비난의 마음에 거리를 둔다. '괜찮아 내가 전문 작가도 아닌데 잘 못쓸 수도 있지'(자기 친절) 나는 백일장에 참가하는 나에게 모진 말을 했던 목소리가 하나의 인물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인격체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속마음을 알고 싶은 호기심을 지닌 채 물었다. (통합적 자기 대화) “네가 정말 바라는 게 뭐야? 혹시 네 마음에 긍정적 의도도 있어?"

처음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부드럽게 재차 묻자 잘 쓰길 바라는 긍정적인 의도가 있다고 알려줬다.


신경정신과학자 에릭 캔들 박사는 인간의 뇌가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학습과 경험에 의해 변화한다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발견했다.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뇌가 노년에도 변화할 수 있다니 중년인 나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이론이다.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경험을 하면 우리의 뇌는 새로운 신경과 배선을 연결시켜 긍정적인 방향으로 신경망을 형성한다. 부정적인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라도 말이다.


평소 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이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뇌가 변화하는 것을 마음근육을 만드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마다 마음근육을 만드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편안해졌다. 힘들고 지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내가 내 부모가 되어 내 마음을 쓰다듬고 보살펴 주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잘하고 싶은 나',  '열등감을 느끼는 나', '있는 그대로의 나'가 모두 내 마음 안에 있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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