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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든쌤 Sep 02. 2024

상실과 애도, 소중한 대상을 떠나보낸 적이 있다면

아름다운 건 왜 사라지는가


2년 전 임재범 공연에 간 적이 있다. 7년 만에 열린 공연에서 만난 임재범의 목소리는 상처 입고 야윈 한 마리 야수 같았다. 그가 영국 록밴드 유라이어 힙(Uriah Heep)이 원곡자인 'rain'이라는 곡을 부르는 걸 듣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덥혔다.


Rain, rain, rain, in my tears Measuring carefully my years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했지만 내 눈의 눈물이 내 살아온 날을 말해준다는 의미인 듯했다. 두텁고 허스키하면서도 애절한 중저음, 브릿팝을 연상시키는 세련된 서정성, (부박한 표현이지만) 가성 대신 진성으로 때려 박는 풍부한 성량에 감동해서 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덤덤하게 부르는 목소리에서 지극한 슬픔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부인을 하늘나라로 보낸 임재범의 슬픔은 현재 진행형인 듯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참담함이나 황망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사는 동안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경험한다. 슬픔과 상실은 겪고 싶지 않지만 피할 수도 없는 삶의 중요한 주제이다. 상실에 따른 반응 역시 사람마다 제각각인데 어떤 사람은 분노로 슬픔을 감추고, 어떤 사람은 슬픔을 억누르거나 회피하기도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첫 이별의 대상은 반려견 '두기'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방영했던 인기 미드 '천재소년 두기'의 주인공의 이름을 본 따서 지었다. 민첩하고 영리했으며 늠름하기 짝이 없었던 진돗개 두기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근처에 사는 또래 애들은 죄다 '동네친구'라는 단어하나로 수렴했고 앞 집, 옆 집 할 것 없이 대문을 열어두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놀던 시절이었다. 개장수가 문 열린 집에 있는 개를 먹을 걸로 꾀여서 몰래 데려가 팔아버린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지만 노느라 문단속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우리 두기도 개장수의 꼬임에 빠져 잡혀 간 걸까. 어느 방향으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면서 녀석을 찾아 몇 날 며칠 골목길을 헤맸다. 언덕길 아랫사람들이 점처럼 보이는 저 멀리까지 눈이 시리도록 뚫어지게 쳐다보고 또 쳐다봤다. 혹시나 저기 어디쯤에 두기가 있지 않을까. 우연히 나갔다가 집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어디선가 나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을까. 간절한 내 바람이 자석처럼 어딘가에 있을 녀석을 끌어당기길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그렇게 영영 다시는 두기를 볼 수 없었다.

그러다 20년쯤 지난 어느 날 신림동에서 두기와 똑같이 생긴 진돗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는 이내 슬퍼졌다. 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본다면 어떻든 두기는 이 세상을 떠났을 터였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노동이라더니 하늘 아래든 내 마음 속이든 그 어딘가에 분명 그리운 대상이 존재하건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그렇게도 힘들게 만들었다.


© carrier_lost, 출처 Unsplash


가족이나 친척, 친구, 지인 등 내가 알던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심정을 기억하는가? 너무 충격적인 나머지 우리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 진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고1이 된 지 한 달 정도 됐을 무렵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어릴 적 친하게 지내다 이사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던 아이였다. 나는 속으로 ‘말도 안 돼. 하필 만우절이라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 낸 게 틀림없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 후로 오래도록 친구가 죽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내가 만든 가설이 사실인양 굳게 믿고만 싶었다.



상담에서도 가끔 부모나 자녀 등 소중한 사람을 잃은 내담자를 만날 때가 있는데 위기상담만큼이나 애도 상담 역시 어려운 작업이다. 한 번은 20대 초반의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분을 뵌 적이 있었는데 생때같은 자녀를 여읜 그 마음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지극한 슬픔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애도를 표한다는 말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저마다 삶의 모습이 다르듯 우리는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슬픔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짧고 집약적으로 애도를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평생을 애도의 과정 속에 있기도 하다. 가끔 삼십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편의 표정 속에서 현재진행형인 슬픔과 그리움을 발견하곤 한다. 그 애틋함이 얼마나 깊은지 감히 예측하기 어려워서 그저 구부정한 남편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곤 한다.

어머니를 여읜 가까운 지인은 시간 날 때마다 혼자 고향에 있는 산이란 산은 다 등산을 다니면서 슬픔을 달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상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가족이나 친구, 반려동물의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를 잃었을 때만 상실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 속에서 경험하는 상실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사나 이혼, 실직, 성적하락, 장애나 질병, 약물남용·중독, 자연재해나 사고 등. 생활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상실감과 슬픔을 경험한다. 때론 대학 입학, 결혼이나 출산과 같은 행복한 생활 사건들을 통해서 슬픔과 상실감을 겪기도 한다.

나 역시 대학원을 졸업한 후 생각보다 상실감이 꽤 커서 당황스러웠다. 40대 중반 대학원에 입학해서 늘 시간에 허덕이면서도 늦게 배운 공부가 너무 재밌었고 비슷한 일을 하는 동기들과의 연대감이 소중하기만 해서일까. 소속감과 안정감, 친밀함 상실이 불러온 슬픔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 Anemone123, 출처 Pixabay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은 심리적 외상과도 같아서 신체적으로도 건강이나 안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실을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애도과정이 필요하다. 애도는 상실로 인한 슬픈 감정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소중한 대상과의 의미 있는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다. 슬픔과 상실감을 다루기 위해 먼저 이 감정들을 우리 안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힘든 마음을 스스로 발견하고 거기에 충분히 머무는 것. 기회가 될 때마다 힘든 마음과 상실과 관련한 생각들을 주변의 친한 사람들에게 표현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슬픔과 상실을 받아들이고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원래의 나로 서서히 돌아가게 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나에게는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주관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 나 역시 폐경을 겪었을 때 제법 오랜 기간 상실감을 느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성으로서 커다란 정체성의 한 부분이 내 안에서 쑥 빠져나가버린 느낌이 들었다. 지긋지긋한 생리에서 해방됐다는 후련함은 한참 후에나 찾아왔다.

상담자로서 내담자의 상실과 애도에는 눈과 귀를, 마음을 열면서 정작 내 감정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신체적 변화잖아.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라고 스스로에게 재촉한 것 같다. 어쩌면 애도라는 생생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의 저자 채정호는 상실처럼 엄청난 일을 겪고 나면 분노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스스로를 탓하거나 감정을 감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때로는 참지 말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정신건강에 유익하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상실을 겪고 있다면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이므로 이럴 때일수록 나의 감정을 남김없이 꺼내놓으라고 권유한다. 내 안의 어떤 감정도 부끄러운 것이나 나쁜 것이 아니기에.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적이 있거나 지금 상실로 인한 슬픔의 한가운데 있는가? 떠나간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에 대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해 죄책감이나 무력감, 분노, 그리움 등 그 어떤 감정이라도 그것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면 충분히 거기에 머무르면서 애도하기를. 힘들어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위로하며, 그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공유하길 바란다. 만약 경험해 봤다면 잘 알겠지만 애도는 일회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작업이 결코 아니며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는 아픈 마음을 결코 치유할 수 없다.   

만약 가까운 사람이 애도의 과정을 겪고 있다면 시간이 약이라거나 이젠 극복할 때도 됐잖아라고 절대 말하지 마시길 간곡히 당부드린다. 그저 소중한 사람, 아꼈던 물건, 그리운 대상에 대한 의미와 기억을 간직하면서 상실의 슬픔을 회복하기 위한 그 지난한 시간을 말없이 함께 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중년여성을 위한 마음 PT


사람이나 동물, 사물 등 소중한 대상을 잃어본 적이 있다면 어떤 경험인지 적어보세요.




소중한 존재(사람, 동물, 사물)를 잃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그 경험을 했을 당시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 이유도 함께 적어보세요.




만약 지금 그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누구와 나누고 싶은지 대상을 떠올려 보세요. 그 사람/그것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적어보세요.




그 사람/그것은 상실에 관한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내가 소중히 여기고 그리워하는 그 사람이나 대상은 자신이 내 삶에서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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