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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엄마 Jul 14. 2020

책상 없는 엄마 번역가의 삶

여러분은 번역가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책으로 빼곡한 서가 속 넓은 책상에서 최신식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며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 그 옆에는 스타벅스 텀블러에 담긴 아메리카노도 한 잔 놓여 있고요. 대충 이런 모습이 상상되진 않으시나요? 저도 구체적으로 그런 꿈을 그린 적은 없습니다만, 오십 줄에 접어들 즈음이면 널찍한 책상에 제 역서를 죽 진열해둔 저만의 서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이런 꿈과는 많이 다르네요. 


제가 말씀드리는 건 멋들어진 서재가 없어서, 널따란 책상이 없어서 불만이라는 뜻이 아니고요. 번역가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설령 그런 공간이 있다 한들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의 행동반경에 따라 제 작업실도 옮겨 다녀야 하거든요.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땐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그럴 땐 아이들 시선이 닿는 곳에 제가 있어야 해요. 그 시선에서 단 1분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엄마, 어딨어? 일로 와서 일해."


그럼 이제부터 저희 집에 있는 저만의 이동 작업실 세 곳을 소개해 볼게요. 


첫 번째, 아일랜드 식탁 겸 책상이에요. 


대부분의 번역을 이곳에서 합니다. 부엌과 거실이 바로 마주 보고 있어 일하는 제 뒷모습만 보여도 애들은 안심하고 놀더라고요. 요즘은 이곳에서 주로 큰애의 수발(?)을 드네요. 작은애 유치원 보내 놓고 나면 9시 반부터 EBS 수업이 시작되거든요. 그럼 저는 식탁에서 번역하는 중간중간 "엄마!" 소리가 들리면 곧장 달려가 숙제도 봐주고 간식도 챙겨줍니다. 그러고 보니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이곳 부엌에서 보내고 있네요.

첫 번째 작업실: 아일랜드 식탁 겸 책상



두 번째, 어째 좀 예스러운 향취가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이곳은 저희 아버님 방이에요. 


지금은 사정상 주말에만 집에 오셔서 평일에는 내내 비어있죠. 그래서 며느리가 감히! 시아버님 책상을 작업실로 씁니다. 2년 전 집을 수리할 때 이곳 방 문을 미닫이로 제작해 거실과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거든요. 그래서 작은 애가 거실에서 놀 때는 주로 여기서 일을 하죠. 작은애 수발을 들기가 아주 용이하거든요. "엄마!"하고 부를 때 제가 고개만 휙 돌리면 "왜?"하고 대꾸가 가능하답니다.

두 번째 작업실: 아버님 방 책상


세 번째, 아이들 방입니다. 


사실 여기서는 거의 일을 안 했는데요, 최근에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내려다보니 아이들 재울 때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더라고요. 저희 애들은 제가 옆에 있어야 잠을 자고, 또 누워서 잠들기까지 30분 정도 걸리거든요. 전 그 시간을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때우곤 했죠. 그런데 침대 옆에 매트 깔고 간이 책상 하나 놓으니 그럭저럭 글 한 편은 쓸 만하더라고요.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제 이동 작업실이 하나 더 늘었답니다.

세 번째 작업실: 아이들 방 매트리스 위 알파벳 책상


막상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제대로 된 작업실 하나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네요. 하하. 


비록 아직은 나만의 온전한 서재도, 책상도, 작업실도 없지만 아이들 곁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내 손으로 밥해 먹이고 옷 입혀 학교 보내고, 돌아올 시간에는 학교 앞에 마중 나가 높이높이 손 흔들며 내 새끼 수고했다 꼭 안아 줄 수 있어서 뿌듯하고요. 어떤 날은 장조림 하나 겨우 만들어 국물에 비벼주지만 그것마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주는 아이들이 있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십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앞으로 한 12~3년 후쯤 아이들이 모두 내 품을 떠나 나도 널찍한 서재에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면, 그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는 또 그 나름대로의 기쁨과 행복이 있겠지만, 정신없이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냥 울컥할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잘 살았다, 칭찬을 해줄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몇 년은 더 작업실 유랑 생활을 해야겠지만, 그래도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려 합니다. 나는, 엄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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