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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엄마 Jan 12. 2021

출판번역가에게 가장 필요한 이것!

<번역이 궁금해> 네 번째 이야기

오늘은 사진 한 장 먼저 보실까요?


이 A4 더미가 뭔지 혹시 짐작이 가시나요? 네, 맞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작업한 책인데요, PDF 파일로 출력한 원문입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많은 것처럼 안 보이는데 실제로는 300페이지 가까이 됩니다. 말이 300쪽이지, 저걸 다 번역했다고 생각하면. 저도 제가 대견해요 하핫.


저는 번역 속도가 그리 빠르지 못한 편이에요. 그래서 하루 작업량이 5페이지 내외인데요, 그렇게 계산하면 300페이지 기준으로 주말을 제외하고 번역 작업에만 두 달 반 정도가 걸립니다. 거기에 교정 작업이 추가되니 한 권 번역할 때 보통 석 달 정도를 잡는 것 같아요.


그럼 결국 석 달 동안은 번역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죠. 좋든 싫든 하루에 5쪽, 2~3시간 정도는 책 번역에 투자해야 합니다. 이렇게 분량을 정해두고 작업하지 않으면 도저히 마감을 맞출 수가 없어요. 하루 이틀 밤새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꾸준함과 끈기


그렇다면 오늘 제목에서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대충 그려지시지 않을까요? 책을 번역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 바로 꾸준함과 끈기입니다. 아무리 영어 실력이 뛰어나도, 아무리 한국어 문장력이 좋아도 장기간의 번역 작업을 유지할 수 있는 꾸준함과 끈기가 없으면 출판번역가로 입문하기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이 다릅니다. 출판번역처럼 긴 호흡에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짧은 호흡에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명 '벼락치기'라고 하죠. 그런 경우 일반 산업번역에서 마감이 길지 않은 일 위주로 하시면 됩니다. 통대를 나온 전문 번역가 중에도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우~ 난 책은 못해."라고 하시면서요.


저는 학교 다닐 때도 벼락치기에는 그리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행을 하든 못하든 시험이 다가오면 일단 계획표부터 짜곤 했거든요. 성향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책 번역에서 필요로 하는 자질과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조금씩 꾸준히 해서 한 권의 책을 다 끝냈을 때의 그 뿌듯함은 정말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네요. 출판번역가로서 느끼는 희열의 중요한 포인트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역을 잘 하는 것과 번역 중에서도 자신이 어떤 분야에 맞는지를 찾는 건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무작정 책 번역이 하고 싶어 뛰어들었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도 종종 있거든요. 실제로 제가 거래하는 에이전시 팀장님 말씀으로는 마감을 맞추지 못해 중간에 잠수를 타는 분들도 간혹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되면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겠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저도 처음에 출판 시장에 입문했을 때는 원서를 받아 들고 '이 두꺼운 책을 언제 다 번역하나?'라고 생각하며 걱정과 불안에 휘청이곤 했습니다. 너무 부담이 됐던지 꿈에서까지 나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한 권 두 권 경험이 쌓이니 조금씩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데 익숙해지더군요. 그렇게 작업한 책이 벌써 스무 권을 훌쩍 넘겼네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계획표를 만듭니다. 주어진 기간과 내가 하루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꼼꼼히 따져 계획표를 작성하는 거죠. 그렇게 하루에 몇 장씩 얼마나 번역해야 한다는 그림이 나오면 일정대로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계획표는 고치고 수정하라고 있는 거겠죠?! 당연히 저도 그대로 못 지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를 대비해 처음부터 아예 보수적으로 잡습니다. 추석, 명절이나 휴가 기간 등은 작업 일수에서 다 빼고 마지막 교정 기간도 길게 잡고요. 그럼 일정이 여유로워서 계획대로 못 지킨 날도 보충이 됩니다.


그런데 이 꾸준함과 끈기는 비단 책 번역에만 적용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최근에 맛을 보기 시작한 각종 재테크, 독서, 자기계발과 관련한 모든 영역이 결국 꾸준함과 끈기 없이는 성공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책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누가 얼마나 오래 이어가느냐의 싸움인 셈이죠. 브런치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시작했지만 글쓰기를 꾸준히 하며 콘텐츠가 쌓이니 구독자 수가 늘더라고요. 황량하기만 했던 브런치 플랫폼이 몇 달 만에 제법 읽을거리가 있는 곳으로 탈바꿈 한 데는 꾸준함과 끈기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끈기를 장착한 꾸준함. 다시 한 번 새기고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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