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초등학교(사실은 국민학교) 새 학기에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철수입니다. 저는 독립운동가 누구와 조선시대 학자 누구의 후손입니다.
조금 이상한 자기소개였지만,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께 우리는 없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게 뭐 대수냐며, 우리도 있다고 하셨다.
"여기 국사책 찾아봐라. 나씨가 엄청 많을 거다."
"그게 뭐예요. 확실하게 이야기해줘야죠."
"나씨는 많지 않아서 다 한 가문이야."
"그건 단일민족 이야기와 다를 게 없잖아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나는 아버지를 계속 귀찮게 했다.
- 흠,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 중에 나대용이라는 분이 계신데, 거북선 만드셨어.
-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잖아요. 무슨 소리예요? 이름이 뭐라고요?
- 알아서 뭐하겠니. 말해도 사람들이 모를 거다. 거북선은 무조건 이순신이야.
- 그러겠네요. 확실하긴 해요? 좀 유명한 사람 없어요?
어린 시절 친구의 자기소개를 듣고 나도 하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결국 주연급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체념했던 그 대화를 다시 떠올리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 게임방을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라는 큰 조직에 입사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은 나를 포함해 5명이 일하는 지방의 작은 영업 사무소였는데, 시장 규모 자체가 작다 보니 전체 조직에서 관심이 크지 않은 조직이었다. 이렇게 사무소가 작으면 조직의 분위기는 크게 2가지 중 하나다.
1. 우리 사무소의 영향력이 크지 않으니,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
2. Stay Hungry, always Hustle! 우리 사무소가 1등이 될 때까지 채찍질하자.
어떤 분위기가 되느냐는 전적으로 팀장의 스타일에 따라 달라지는데, 당시 나와 함께하는 수호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후자의 분위기를 조우하게 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시작한 사회생활. 초기 6개월은 너무 힘들어서 퇴사를 고민할 지경이었다.
리더십, 생활여건, 근무장소 등 어려운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닐 정도로 복합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악몽의 실적회의였다. 회의를 한 번 시작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분위기가 너무 험악하여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 주도 실적이 이렇게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응?
회의는 항상 이렇게 큰 소리로 시작되었다. '올해 1등 한다고 연초에 이야기하지 않았냐', '지난달에는 이번 달 잘 될 거라고 하지 않았냐',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생각도 없으면 너희들의 월급을 내게 주라' 등 계속되는 비난과 짜증이 쏟아졌다. 그러면 선배들은 길게 침묵했다.
왜 말이 없어!! 안 되겠네!! A과장부터 한 명씩 이야기해봐!!
이 대사가 터지면 선배들이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매번 회의시간에 팀장의 이 대사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말을 아꼈다. 지금 이야기하면 이따가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비슷한 시간이 여러 차례 흐르고 어떤 선배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우여곡절 끝에 좋은 성과를 거뒀다. 팀장의 큰 의사결정이나 역할은 없었지만, 직원들끼리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여 다 함께 실행에 옮긴 결과였다. 그리고 얼마 후 지역 본부장은 작은 사무소가 큰 일을 해냈다며, 직접 방문하고 팀장에게 시상과 함께 공로를 치하했다. 사무소 선배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상은 팀장이 받았다. 팀장은 그 날 저녁 회식자리에서 한 마디 했다.
내일부터는 앞으로 어떻게 실적을 유지할 것인지 대책 회의하자고.
입사 첫해. 그해는 정말 악몽이었다.
문득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다가 나대용 장군과 함께 역사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약간의 코미디를 섞어보면, 이런 장면이지 않았을까. 지금의 사무실과 같은 회의장에 이순신 장군과 다른 여러 장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순신 장군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일 왜놈들의 배가 100척이 넘게 온다는데 어떻게 막을 거야? 응?
왜 말이 없어!! 안 되겠네!!
A장군부터 이야기해봐!!
여러 장군의 아이디어가 발표되다가 그 자리에 있던 나대용 장군이 거북선을 한번 만들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순신 장군은 좋은 아이디어를 실행시킬 정도로 훌륭한 리더였고, 실제로 체암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당시 나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상상까지 했을까.
그 시절을 겪기 전까지 나는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별 생각이 없었다. 누가 만들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거북선 외에도 많은 것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영화를 보면 주연보다 조연, 감독, 엑스트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결과물을 보면 그 과정에서 누구의 땀과 노력이 포함되어 있는지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찾게 되었다.
저 엑스트라 분 가족이라면 이 장면만 기다렸겠지.
뮤지컬을 보면 뒤에서 노래 부르시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 앨범이 나오면 가수보다 작곡가, 작사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음악을 듣다가
베이스 연주가 되게 멋진데, 누구지?
라고 묻기 시작했다. '누구 새로 낸 음악이 좋던데', '노래 잘 부르네' 정도의 후기 밖에 보여주지 못했던 내가 멜로디와 마디, 연주에 대한 디테일이 생겼다. 어떤 조연이 출연하는 영화를 따로 골라보는 습관도 생겼다. 새로운 관점이 열리니 내 삶이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졌다.
노래방에 자주 가는 사람은 두 종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과 노래 레퍼토리가 많은 사람.
그 해는 악몽이었지만, 내 삶의 레퍼토리는 다양해졌다. 출근해서 깨끗한 사무실을 보면 관리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크게 보였다. 책상에 회의 자료가 프린트되어 있으면 준비하는 후배를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새 책이 나오면 작가 외에도 편집자를 보고 디자이너도 본다. 나중에 혹시 책을 출간한다면 이 편집자가 해주시면 좋겠네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삶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많이 보게 되니 이야기할 것도 더 많아졌다.
왓슨, 자네는 보긴 하지만 관찰하지는 않는 거지.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라네. - 셜록홈스
날씨가 서늘해지는 것을 보니, 문중의 제사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번 제사 때는 나대용 장군을 위해 남몰래 향을 피우며 새롭게 보게 된 것을 말씀드리고 감사드려야겠다. 아참! 그전에 그 시절 선배들에게 오랜만에 안부 인사라도 드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그들도 내게 유용한 관점을 선물한 나만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가 아닌가. 돌이켜보면 나쁜 인연도 좋은 인연으로 풀이될 때가 있다. 이 또한 삶의 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