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갔어, 버나뎃>
긴 고객 미팅을 마치고 직장 동료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있었다.
회사 일들, 개인적인 일들, 시시콜콜한 여러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직장 생활 정말 오래 했는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은 거 같아요.
그래요? 그래도 정년까지 많이 남았잖아요.
흠.. 그렇게 해도 길어봤자 15년 정도 일 거 같아서요.
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네요. 아이들 아직 다 크려면 한참 남았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뭘 할 수 있을지...
그래도 경력이 끊기진 않았는데, 15년 후엔 끊길 수 있으니.. 뭔가 다른 걸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요.
그저 막연히 많이 남았다고만 생각했다.
직장 동료의 저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이제 직장생활의 후반기로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경력 단절이라고 할만한 시기를 겪지는 않았다. 중간에 6개월 정도 회사를 나와 쉰 적이 있긴 하다. 그때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치듯 그만두겠다고 했던 시기다. 어렵게 그만두겠단 말을 내뱉고 나서 내 머릿속은 온통 '이제 앞으로 어쩌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작은 후련함이 지나가고 큰 불안이 찾아왔다. 친구와 술을 마셔도, 집에서 침대에 누워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어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불안한 마음이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혔다.
고민하다 내가 찾아간 건 영어학원이었다. YBM이라는 영어학원을 찾아서 영어 공부를 하려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다. 시간표를 보고 일반 영어 수업 하나, 듣기 위주의 학습을 하는 수업 하나, 외국인과 1대 1로 대화할 수 있는 수업 하나. 내가 모아둔 돈을 모두 탈탈 털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꽤나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던 건, 어느 정도 내 불안을 줄여줬다. 단절된 경력을 미약하게나마 이어 줄 수 있는 얇은 다리가 된 학습활동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불안감에 잠식되어 다시 일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은 약간 괴짜형 인간처럼 보이는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고 여러 수상을 한 건축가인 그녀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그녀는 점점 일자리가 줄어 집에서만 머무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과의 교류에 익숙하지 못한 그는 가족들과도 잘 지내는 듯하지만 딸(엠마 넬슨)과 남편(빌리 크루덥)과 여행 가는 것도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한 편으론 그녀의 경력이 끝난 듯 보였다.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는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은 버나뎃이 원하던 상황이 아니고, 그가 특별히 뭔가를 아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그녀의 성향이 단지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뿐이다. 어떤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도 자신이 원하는 걸 알지 못했다. 여기서 그녀의 불안이 시작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경력은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경력이 끝난다. 특히 나 같은 직장인이라면 60살이 되면 경력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 다른 무언가를 배우거나 준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워내면서 그런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른 것에 신경 쓰다 어느 순간 경력이 끊기는 절벽 앞에 내몰리는 것이다. 나 역시 그 절벽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다.
그 불안이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가능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찾아온다. 하지만 쉽게 선뜻 좋아하는 것을 할 수는 없다. 야구를 좋아한다고 야구 선수나 해설가가 될 수 없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가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말 엄청난 실력이 있지 않고는 갈 수 없는 목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번에, 한 번에 그곳을 갈 수는 없다. 돈을 버는 것까지 연결시키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또 불안해진다. 불안해서 뭔가 좋아하는 걸로 생산적인 활동을 시도해 보지만, 더 큰 걱정이 마음속에 찾아온다. 그래서 많은 40대들이 이렇게 불안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뜻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그녀는 혼자 떠난 여행에서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던 일의 재미를 찾아낸다. 꼭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간절한 마음, 그런 마음이 한순간에 버나뎃의 마음속에 찾아온다. 그건 일생일대의 기회였고, 그녀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였다.
버나뎃은 그렇게 다시 자신의 경력을 되살려낸다. 그녀 스스로 찾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시도했기 때문에 올 수 있었던 기회다. 만약 그녀가 계속 집에만 있었다면 아무런 기회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경력은 정말로 끝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러려고 세상에 태어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위협이 되지!
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야.
일 다시 시작해. 뭐라도 만들란 말이야!
사실 이 말은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꼭 엄청난 창작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뭔가 만들어낼 수 있다. 아주 쉽게 일기를 쓰면서 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게 쓰다가 자신만의 이야기가 생각나면 그 내용을 길게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엄청난 능력이 아니더라도 시작을 하고 계속해나간다면 무언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준다.
만약 경력이 끝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우리는 마냥 쉴 수는 없다.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마냥 불안함을 느끼며 손 놓고 있기보다는 무언가 영감을 줄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버나뎃이 했던 것처럼 여행을 떠나도 좋고 뭔가를 배워도 좋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사실 늘 불안하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런 생각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때론 우울하게 만들거나 짜증 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누구나 버나뎃 같이 민감한 경향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본다면 영화 속 버나뎃처럼 다시 끊어지는 경력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오랫동안 하던 것이 아니라도 우연한 기회에 또 자신만의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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