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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걸 써보자.

쓰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많이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by 김경태 May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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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참 즐거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 생각만으로도 씐나!


물론 나를 불쾌하게 하는 것도 써야 하는데 그것도 씐나! 왜냐면 싫어하는 사람 뒷담화하는 맛 같아서 ㅎㅎㅎ


가볍게 오늘 글 시작해본다.





사람, 사랑, 한결같음, 변화, 추억

이걸 묶으면

“사람을 사랑하며 한결같이 변하지 않음을 추억하는 삶을 살고 싶다.”... 정도 되겠다.



1. 음악

도저히 한 곡을 꼽을 수 없다. 분위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 기분에 따라 듣는 곡이 천차만별이다. 내 삶에 음악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매일 들어왔고, 매일 듣고 있고, 앞으로도 매일 들을 예정이다.


내 주변에도 대부분 음악을 즐겨 듣는다. 아마도 내가 듣은 음악은 그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을까?


어릴 때 아빠 차를 타면 항상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가 나왔다. 훌리오의 카세트 여러 개가 아빠 차에 있고 기분에 따라 번갈아가면서 들었다. 아빠가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핸들을 탁탁 두드리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 덕분에 나와 누나의 애창곡에 항상 훌리오의 “Hey”가 자리하고 있다.


누나가 내가 듣은 음악에 미친 영향은 6할 정도 된다. 학창 시절 내가 팝송을 많이 들었다면 누나는 가요를 많이 들었는데, 누나가 좋아하던 이선희 노래는 앨범의 넘버링 모든 가사를 꿰고 있을 정도다. 대학생 때 누나가 사랑하시던 김현철/ 조규찬/ 여행스케치/ 빛과 소금/ 윤상/ 이적/ 이소라/ 정재형 등의 노래를 나도 즐겨 듣게 되면서 그들의 음악이 지금도 내 즐겨 듣는 곡 상위에 항상 존재한다.


사촌 형은 내게 팝송의 길을 열어줬다. 초등학생 때 “Touch by Touch” 정도만 알던 내게 조지 마이클을 알려준 장본인이다. 당시 Wham 멤버였다가 처음 솔로 데뷔하여 “Faith”를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음반을 형은 부산 남포동의 깡통시장에서 구입해 듣고 있었다. 형 덕분에 팝송에 눈을 뜨면서 나의 팝송 사랑은 시작되었다. 참 많은 용돈을 음반가게에 헌납했다.


고등학교 독서실 친구 7명 (예전의 연대기에서 설명한 ES)은 각자 다른 분야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참고로 그때 독서실 내 고정좌석 사물함에는 CD가 50장 정도 있었다. 중3 때 아버지가 사주신 소니 Discman 덕분에 나는 CD 음질로 음악을 들으며 공부 대신 영혼과 소통했다. 집 근처 여고 앞에 <사계>라는 레코드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참 많은 음반을 구입했고, 주인아저씨와 친구들과 함께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아저씨는 잘 계시려나...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셨는데) 그때 내가 발굴한 신인이 윤도현이었다. 1994년에 나는 신인 윤도현의 1집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사서 들었고 (진짜 아무도 모를 때) “사랑 2”가 노래방에 없어서 한탄했었다. 군대를 갔다 오니 윤도현은 스타가 되어있었다. 그들과 강산에/ 신성우/ 신승훈/ 공일오비/ 푸른 하늘/ 더 클래식/ 정경화/ 본 조비/ 레드 제플린/ 메탈리카/... 엄청나게 많은 장르의 음악을 소화했다.


2002년 미국에서는 투팍/ 스눕독/ 비기/ 퍼프 대디/ 에미넴/... 힙합을 엄청 열심히 들었다. 또한 카를로스 산타나의 음악을 통해 남미 음악에도 미친 듯 홀릭했다. 컨트리 음악과 재즈 등과 같이 다양한 음악을 통해 영혼과의 교감을 확장시켜가는 커다란 마일스톤이었다.


이런 사람들과 상황들을 계기로 나는 2014년부터 1165일간 (3년 하고도 70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네이버 동창 밴드에 <kennie’s 레코드 방>이라는 조그만 음악 채널을 운영했었다.


내 삶에 음악은 팔 하나 정도 된다.



2. 영화

내 첫 영화는 <오싱>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일본 소설이 원작이고 내가 본 영화는 1985년 똑순이 김민희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였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난 엄마와 누나 손을 잡고 부산 서면에 있는 대한극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본 기억이 난다.


그 이전에 부산 시민회관에 만화영화를 보러 간 기억은 있다. <버뮤다 5000년 미래소년 쿤타>(1982)인데 이건 내 기억으로 분명 내가 극장에서 본 첫 만화영화가 맞다. 할머니가 바래다주셨는데 누나랑 내가 손잡고 극장에 들어가서 본 첫 영화였다. 영화 중간에 들어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처음 부분을 못 봤다고 말했지만 나가라고 해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암튼,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비디오를 샀다. (1984년 LA 올림픽 녹화한다고) 당시는 비디오테이프 대여라는 개념이 없어서 테이프를 하나 구입하고 그것 다른 것과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아빠가 아들용 비디오테이프를 사주셨는데 서면의 지하상가 비디오 가게에서 <슈퍼 태권 V> 테이프를 당시 3만 원 정도 주고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뻥 아니고 50번은 본 것 같다. 대사를 다 외울 때쯤 엄마를 꼬드겨 서면으로 쇼핑을 나가 테이프를 <쏠라 1,2,3>로 바꿔왔다. 그건 30번 정도 봤다. 그즈음에 집 근처에 비디오 가게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3000원을 주면 일주일 정도 대여해주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일요일 오전 만화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영화의 지평을 넓혀준 녀석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구태훈이라는 친구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소중한 친구다.) 녀석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구니스>를 봤다며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당시 <구니스><ET>를 안 봤던 나는 (난 만화만 봤다.) 녀석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녀석 덕분에 만화를 넘어 영화에 들어섰다.

녀석과 둘이서 주말이면 서면과 남포동을 다니며 극장에서 참 많은 영화를 봤다. 당시 영화표가 2,000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용돈이 넉넉했다보다.

중학생이 되면서 함께 <인디아나 존스 3 - 최후의 성전>을 보았고, 고등학교가 갈라지면서 마지막으로 녀석과 봤던 영화가 <터미네이터 2>였다. 당시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했는데,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던 친구들이 홍콩 느와르나 성룡 영화를 좋아해서 홍콩영화도 참 많이 보러 다녔다. 녀석 덕분에 나는 영화를 입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생 때는 한 달에 두 편정도 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내 베프이자 짝꿍이었던 일하와 함께 야자시간에 몰래 도망 나와 학교 앞 전철역에서 전철을 타고 남포동에 가서 영화를 봤었다. <쉰들러 리스트> <여인의 향기>... 당시 유명했던 영화는 거의 대부분을 극장에서 봤던 것 같다. 물론 대학에 가서도 녀석과 서울과 수원에서 일주일에 한두 편의 영화를 봤다.


군대에서 <타이타닉>을 봤다. 워낙 유명한 영화였다. 나는 인사 행정병이라 우편물을 들고 부대 밖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어서 그날 아침 일찍 부대를 나와 혼자서 원주의 한 극장에서 표를 사서 봤다. 극장엔 나 혼자였다. 그 커다란 극장에 나 혼자 앞자리에 발을 걸치고 드러눕다시피 해서 담배를 피우며 봤다. ㅎㅎㅎ


지금 아내도 내 영화 친구였다. 방학에 부산에 오면 연락해서 영화 보여달라 밥 사달라고 내가 졸라댔다. 그녀와 참 많은 영화를 봤는데 아마도 우리가 사귀기 직전에 봤던 영화가 <번지점프를 하다> 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영화를 좋아하고 한 달에 두세 편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출근이 없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조조를 보는데, 보통 아침 7시 전후에 시작해 9~10시 정도에 끝난다. 영화를 보고 사우나를 갔다가 커피숍에 들러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쓰고 있으면 아내가 애들 일어났다며 밥 먹자고 연락이 온다. 보통 내 휴일의 루틴인데 애들이 크면서 점점 내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3. 책

“언제부터 책을 좋아했을까?”라는 질문은 내 책 <독서의 맛> 첫 챕터에서 이야기를 했었다. 이것보다 “나는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을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볼까 한다. 난 분명 책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실 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좋다. “소유”라는 인간 본연의 욕구인데 책을 산다는 것은 내게는 작가라는 귀중한 인재를 내 집으로 초대한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책 욕심이 많다. 내 서재에 있는 책 중에 아마도 10% 정도를 읽었을 거다. 그래도 책을 계속 산다. 읽을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끝없이 샘솟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글귀 중에 책을 읽다 보면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난다는 것을 “책이 책을 낳는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피식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정확히 지금 내가 그렇다. 그래서 내 책에서도 “책이 책을 낳는다.”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차츰 열리는 순간이 온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작가가 묘사한 순간이 그렇다. 때론 똑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그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이럴 때면 호기심이 일고 책에 몰입하게 된다. 나는 왜 그런 눈(감각)을 갖지 못하고 있을까? 자책해보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면 사라지고 그저 신기하게 읽어가며 이제부터 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즐거움이 생긴다. 하나를 보면서 바로 열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가 꾸준히 축적되다 보면 점점 둘셋을 보게 되는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대한다. 내게 책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사서 모은다. 하나의 책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감각/ 생각/ 단어/ 느낌/ 뉘앙스/ 문구/ 사상/ 철학/... 특히 눈, 그들의 차별화된 눈이 내 서재에 빼곡히 들어차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 동의보감>의 작가 이은성이 묘사한 유의태의 침을 놓는 장면이 그랬다. <상도>의 최인호가 알려준 “계영배”가 그랬다. <태백산맥>에서 조정래가 묘사한 외서댁이 그랬고,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가 묘사한 와타나베가 그랬다. <남한산성><칼의 노래><자전거 여행>을 읽으며 김훈의 눈을 뽑아 가지고 싶었고, 이외수의 <벽오금학도><칼><들개>에서 그의 상상력을 갈아 마시고 싶었다.



4. 사람


위에서 언급한 음악 / 영화 / 책 모두 내가 시작했다기보다는 인간관계에서 그들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충돌하면서 엮어낸 산물이다. 그들의 관심에 내가 반응했고, 내 관심사에 그들이 접근해왔다. 서로 이것저것 정보를 주고받으며 모르는 새 정이라는 무형의 신경물질이 전달되었고 서로 교감했다.


마흔이 넘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이 점점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의 집합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람이 존재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인문학 인문학 하는 것이겠지. 그걸 이제야 머리가 아닌 몸이 오롯이 느끼게 되었다. 좀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 겪으며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싶지만 시공간의 제약이 있기에 한계가 있었다. 매번 사람에 대한 갈증이 느껴지면 어김없이 관련된 책을 찾아서 읽어보는 게 일상이 되어간다.


세상에는 내 기준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 물론 그들 각자도 호감과 비호감이 존재할 거다. 그리고 내 호감도와 그의 호감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의 호감도가 상충하게 되면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고, 서로의 비호감도가 부딪치면 잡음이 생긴다.


난 이런 사람이 좋다고 딱 단정 지어 말을 못 하겠다.


처음에는 분명 좋았는데 점점 미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좋거나 싫은 사람도 있다. 물론 처음엔 별로였지만 점점 호감이 가는 경우도 많다.


난 타인들에게 호감이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한결같은 사람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정치에서 많이 나오는 철새라는 단어가 내 이름이 쓰여있는 칠판에는 쓰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사람은 분명 시기와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오죽하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영화 제목에 모두들 감탄해 마지않는 것은 살아보면 변함을 이해가 되기 때문일 거다. 물론 내 주관도 많이 변했다. 마치 꿈이 변하고 외모가 변하고 성격이 변하듯 그렇게 내 사상도 많이 변해갔다. 하지만 내 삶의 근간을 이루는 “나는 이런 사람으로 살고 있다.”라는 문장의 뼈대에 각인된 DNA는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난 변한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물론 좋은 변화와 발전은 충분히 축하해주고 칭찬해줄 일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그들을 알게 될 당시의 그가 가진 사상(어쩌면 이것도 내 해석 안에 존재하는 거라 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이 변한 것을 목도하면 그를 조금씩 멀리하게 된다. 내 성격인 것 같다.


난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도 “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네!”라는 말이다.


근데 생각해보니 나는 20년 전 그 방종 같은 자유를 누리던 철부지 정신 못 차라던 막무가내 날라리였는데, 그러고 보니 내가 완전히 변한 거네. 내가 이렇듯 변했기에 남은 변하지 말라는 생떼를 쓰는 걸까?


아... 잘 모르겠다.


암튼 내 겉과 생각은 변했어도 내 자아(ego)는 안 변한 걸로 하고 급히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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