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크루즈
MIT에 도착한 지 2주가 지났다. 많은 오리엔테이션을 지나 뇌인지과학과의 하이라이트 행사 크루즈 행사를 진행했다. MIT뇌인지과 학과에서 일하는 모든 교수들, 직원들, 포닥, 박사과정, 인턴들까지 총 300여 명이 함께 크루즈를 통쨰로 빌려서 선상파티를 진행한다. 무료다.
이 행사의 목적은 네트워킹이다. 같은 뇌과학 연구를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도 있고, 좋은 협업 아이템이 나올 수도 있다.
맛있는 밥을 주고 무료로 와인과 맥주를 준다. 이제 사람들과 재미있게 대화하며 친목을 도모하면 된다. 한국에서 있을 때는 이런 공식적인 사람들과 친해지는 행사가 잘 없었다. 가끔 랩 내에서 회식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빌딩 전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를 주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에서는 하드스킬은 강조되지만, 소프트스킬은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하드 스킬은 자격증, 급수, 숫자 등 실질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요소를 주로 말하고, 소프트 스킬은 경청하기, 사람들과 대화 나누기 등 수치로 계량할 수 없는 정성적인 요소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자신이 하는 일이나 연구를 재미있게 스토리 텔링 할 수 있는 소프트능력에 대한 중요도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다. 아예 경청하기와 같은 워크숍도 있다.
그리고 1년 차 대학원생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미션은 어느 랩에서 로테이션을 할 것인지 정하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대학은 요즘 로테이션 시스템을 도입했다. 로테이션 시스템이란 3~4개의 연구실을 정해서 4~8주 사이동안 그 연구실에서 살면서 교수와 나의 합은 잘 맞는지, 그 연구실의 사람들과는 잘 맞는지 경험해 보는 것이다. 뇌과학과 같은 분야의 박사과정은 평균이 6년이다. 6년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낼 사람들이자 연구 주제이니 신중하게 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연구실에서 출판한 논문들을 읽어보고 인터넷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정보들을 읽어볼 수는 있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직접 경험해 보고 나와 가장 잘 맞는, 내가 추구하는 연구를 가장 잘 지지해줄 수 있는 교수와 그룹을 찾으라는 형태다. 대학원에 들어오고 자신의 스타일과 잘 맞지 않아서 고생하고, 또 그로 인해 몇 년이 지나 자퇴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참 좋은 시스템이다.
내가 원하는 랩 사람들을 찾아서 그 랩의 분위기를 탐색하는 것이다. 교수는 어떤 사람인지, 이 랩에 장점과 단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연구실이 아닌 크루즈에서 맛있는 밥 먹고 와인도 한잔 했으니 편안한 분위기에서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모든 행사와 로테이션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야 짧은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해서 인상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말할 수 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지 나에게 잘 맞는 랩을 정할 수 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나에게 잘 맞는 연구실을 찾기란 당연히 훨씬 어려울 것이다.
나는 우선 3~4개의 로테이션을 골라야 한다. 이렇게 기록을 한번 더 하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내가 현재 가장 관심이 있는 분야는 정신병리학분야다. 그중에서도 불안, 우울, 불면증 등의 문제가 왜 생기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코어 한 질문이다.
F.Z 교수 연구실은 MIT 바이오 관련한 연구실 중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성과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 가위 기술의 거장이며, 20여 명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임에도 매년 3~4개의 CNS(Cell, Nature, Science의 약자로 학계의 모든 사람이 꿈꾸는 최고의 학술지) 저널에 출판을 한다. 평생을 노력해도 하나의 CNS 저널을 못 내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이 연구실에서는 꾸준하게 매년 3~4개의 결과물이 나온다. 마침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인 불면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옮긴다. 세포를 이용한 실험을 많이 하기 때문에 비교적 졸업이 빠르다. 다만 5년 전 이 연구실에서 로테이션을 했던 동료 대학원생에게 들은 바로는 이 연구실은 가장 야망 있고, 가장 워커홀릭적인 사람들이 모여있는 연구실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최소 주 60시간 일한 다고 한다.(그래서 졸업이 빠른 것이었다!) 연구 외에 특별한 삶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과학적 성공에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내가 그러한 삶을 대학원생기간 동안 살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E.B 교수는 천재다. 15살에 대학을 가고, 21살에 MIT에서 학위 3개를 받으며 졸업했으며 26살에 MIT교수가 되었다. 대학원생 숫자만으로는 전체 연구실 중에서 가장 큰 편임에도, 교수가 시간관리를 아주 철저하게 잘해서 교수와 최소한 2주에 한 번은 무조건 1대 1로 만날 수 있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뇌과학연구를 위한 도구를 개발하는 연구실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효과적으로 제대로 실패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자로서 생각하는 법, 과제 관리하는 법, 연구하는 법에 대한 방법론을 가장 잘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을 것 같고, 연구 외의 삶도 보장받는 곳이다. 다만 이곳에서 하는 연구는 내가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연구는 아니다.
M.J교수는 사람들을 홀리는 매력이 있다. 자신이 하는 연구와 과학 그 자체가 너무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이 보인다. 그 진심은 말과 얼굴 표정에서 묻어나기 때문에 언제나 그 교수와 미팅을 하면 신이 나고 에너지를 얻는다. 다만 이 교수는 원숭이를 이용한 실험을 한다. 원숭이 실험은 다른 동물들 실험에 비해 오랜 시간 동안 훈련해야 하고, 규율이 복잡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한 연구실에 있는 미래의 동료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매력적이다. 사람들과 함께하면 참 재미있을 것 같은 곳이다. 다만 이 연구실 역시도 고등사고 및 추론에 대한 질문이 가장 중점적인 곳이라, 내가 가장 원하는 질문을 잘할 수 있는 곳인지는 모르겠다.
J.G교수의 연구실은 내가 가장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불안, 우울증에 대한 연구를 사람의 뇌를 이용해서 한다. 다만 교수가 학계에 워낙 오랜 시간이 있었고, 이제 은퇴가 가까워지고 있다 보니 교수에게 직접적으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적 불안에 대한 약으로서의 칸나비디올(cannabidiol, CBD)을 직접 확인해 보는 clinical Trial을 진행 중이다. 이 약의 효과에 대한 것이 증명이 된다면 학자로서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을 것이고, fMRI 자료를 이용해 머신러닝 모델을 학습하는 직접적이고 바로 생각이 되는 과제도 현재 바로 생각이 난다. 원숭이 실험이 오래 걸리는 만큼, 사람을 이용하는 실험에는 더 많은 규제가 있고, 생물학적인 능력을 배우기보다는 어떻게 사람들을 모으고, 자신의 실험을 잘 홍보하고, 그를 위해 꼭 필요한 펀드를 레이징하는 능력등의 능력을 많이 배울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뇌에는 전극을 넣을 수 없으니 그만큼 데이터에 질은 매우 떨어진다.
A.G교수는 내가 1년 반 동안 인턴을 했던 연구실의 교수다. 인성적으로 너무 훌륭하며,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지지해 주시는 것이 느껴진다. 쥐를 이용한 실험을 하기에 원숭이와 사람보다는 비교적 빠른 편이다. 그러나 쥐의 경우는 모든 실험이 끝나면 그 쥐를 안락사시키는데, 쥐를 안락사시킬 때의 죄책감이 생각보다 컸다. 이 연구실에는 현재 대학원생이 한 명도 없어 혼자 대학원생으로서 조금 외롭고, 나이가 워낙 많으셔 내가 졸업할 때까지 건강을 잘 유지하실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크다.
정리를 해놓고 보니 모든 연구실이 다 장점과 단점이 있다. 나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성공인지, 혁신을 만드는 사고방법을 배우는 것인지,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것인지, 내가 가장 궁금한 질문을 푸는 것인지, 혹은 나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지. 결국 답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