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빠가 바로 나야 나
고등학교 시절, 교지를 들춰보다가 아주 인상적인 글을 봤다.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은 글이었는데 나와 아빠와의 사이가 매우 나쁨에도 불구, 이 글을 읽으니 없던 효심까지 생기게 만드는 아주 가슴 찡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다 보니 이 글쓴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아주 특이했고 자신의 실명으로 인터넷 여기저기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전차로 이 사람과 연락이 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와 학교에서 처음 만나기로 한 날, 맨 마지막 시간이 종교수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시간 내내 배우라는 성경은 안 배우고 얼굴에 파우더 떡칠하고 아이참으로 눈에 또 다른 주름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몰골을 하고 그 글쓴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어찌나 설레던지... 글쓴이는 나에게 스크류바를 사줬다. 교실에 와서 그가 이걸 사줬다고 자랑하니 어떤 아이가 그 스크류바를 내 허락도 없이 배어 먹었다. 이런!!
그와의 사랑이 이렇게 순탄하게 이어지면 참 좋았으련만... 나의 운명은 애석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와 실제로 대면한 이후로 나와의 연락을 꺼렸고 나는 그걸 앎에도 불구 그에게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훗날 그 남자가 나와 같은 학년의 어느 여자아이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남자만 골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난 아직도 그를 잊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기나긴 짝사랑은 그가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된 후 와장창 깨지게 된다.
금사빠도 아니고 글사빠라니!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나.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지 못할 짝사랑의 추억이지만 나란 인간은 글만 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아주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어쩌면 당시 문학소녀로 사느라 문학과 현생의 구분이 잘 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가끔은 글과 사랑에 빠지긴 하지만 과거처럼 글쓴이와 유사연애를 하진 않는다.
다만 그들의 문체와 솔직함에 감명을 받아 그들이 발간한 책들을 사 모으고 끊임없이 읽는다. 어쩌면 그들의 애독자가 된 것이랄까.
나와 그의 사이도 단순히 이런 작가와 애독자 사이였다면 어쩜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갔을 수도 있을 터인데...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젠 중년이니 글사빠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