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존밀크 Dec 15. 2024

2024년의 글쓰기, 그리고 2025년




2023년 말, 영국에서 2024 다이어리를 샀다. 2024년은 나의 영국 생활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해였다. 기대되는 마음보단 고국에서의 삶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다. 그래도 새로운 다이어리를 펼치고 꾸미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새 다이어리의 첫 장에는 올해의 한 마디를 쓸 수 있는 페이지가 있었다. 무슨 말을 쓸까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 순간 탁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균형 잡기

그동안의 삶은 해야 하는 것에 질질 끌려 다니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능 잘 봐서 좋은 대학 가기, 대학이 후지면 취업하기 좋은 과라도 가기, 졸업과 동시에 임용 합격하기 등등등. 내 젊은 날의 초상은 부모님이 자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을 해내기 위해 애써왔던 나날들이었다. 결국 해낸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다. 인생 전반적으론 못난 자식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지난 청춘에 대한 나의 평가다.


그나저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해야 하는 것들에 숨죽여 살아왔던 터라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해야 하는 것을 나름 이뤄낸 청년은 그 결실을 즐기지 못하고 중년이 되어 가는 길목에서 종종 죽음을 떠올렸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것일까,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숙제들의 무게에 미끄러져 그런 것일까. 죽음의 유혹에서 겨우 멀어졌을 때, 비로소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명확히 생각하게 되었다.


난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고 공감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쓴 작품으로 이 세상을 위로하고 어루만지고 싶다. 내 청춘을 불살라 해야 하는 것들을 해냈다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되지 않을까.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통 모르겠다. 일단 글이라도 꾸준히 써야 할 것 같아서 그동안 운영했던 블로그에 조금씩 습작을 남기는 수준의 노력을 하기로 했다. 허나 이는 강제성이 없으니 업로드 기복이 대단하다.


그렇게 살던 와중 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땅엔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이 수백 수천가지다. 또다시 그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일상을 버티던 중, 난 어느 게시물을 보게 된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좌를 하단다.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공저 형태로 책으로 만들어 준다고, 매우 혹했다. 일단 저 강좌를 들으면 내 책이 하나 탄생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있나, 바로 수강신청을 했다.


개강일, 도서관 지하에 있는 강의실로 갔다. 다양한 연령대의 얼굴들이 여럿 앉아 계신다. 직장이 끝나고 급히 온터라 피곤할 수도 있는데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다들 대단하다. 원래의 나는 그런 모습에 주눅이 드는 편인데 이번엔 괜히 나도 열심히 하게 된다. 우리를 담당하셨던 작가님의 가르침과 애정 섞인 피드백도 나를 더 열심히 쓰게끔 만드셨다.


12주 간의 수업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쓴 글이 담긴 책을 수령하게 된다.





시중 서점에서는 살 수 없지만 나름 ISBN 등록이 되어 있는 정식 출간물이다. 내가 쓴 글은 단 두 편이지만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며 글쓴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지라 수강생들의 이름은 대부분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글을 읽으면 수강생 얼굴이 머릿속에 둥실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도 내 글을 읽으며 날 떠올릴까 괜히 궁금해졌다.


출간의 기쁨을 맛봤던 여름이 가고 가을, 그리고 겨울이 왔다.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도서관에서 메시지가 왔다. 무려 공저 작가들을 위한 출간기념회를 한다고. 시중에서 구할 수도 없고 심지어 저자인 나도 딱 하나밖에 없는 책이지만 그래도 우리를 위한 기념회를 해주신다고 하니 기쁜 마음이 들어 한달음에 달려갔다.



 




출간기념회에 가니 함께 책을 만들었던 문우들이 있다.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하던 차에 어느 분께서 함께 차 한 잔 하자고 하신다. 난 이 분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우리가 다시 마주 앉을 일이 없을 것 같아 함께 카페로 갔다.


함께 차를 마시며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글쓰기에 대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계셨다. 심지어 어느 분은 출판을 위한 시작점에 섰다. 난 내 책을 만들고 싶다고만 생각만 하지 그걸 이루기 위해 노력하진 않는데...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듣던 와중, 문우들에게 내가 2025년에 할 노력에 대해 슬쩍 고백해 버렸다. 그 노력은 바로 문예창작과 편입이다.


소녀 시절의 나는 '이름 있는'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서 각종 문학상 수상을 하는 걸출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꿈을 이루기엔 내 능력은 너무나 미천했으며 무엇보다 부모님이 도와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중년의 삶은 해야 하는 것에 질질 끌려가며 살기보단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 인생의 단 한순간만이라도 내가 꿈꿔오던 삶을 살아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글을 써야 하는데 지금처럼 살면 솔직히 쉽지 않다. 나에게 조금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기본기를 닦고 좋은 작가가 되는 발판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하고자 한다.


일하며 공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지난 삶을 통해 충분히 경험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길 아닌가. 부디 휴학하지 말고, 자퇴하지 말고 새로운 대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