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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정 Apr 28. 2024

일상에 다정해지기로 했습니다

마음의 여유라는건 어디에서 오는가

꽃잎이 지기 무섭게 날이 더워졌다. 찰나의 봄을 여유롭게 만끽하고 싶은 어느 날, 요즘 핫하다는 서순라길을 걸었다. 핫한 거리라더니 역시 평일 낮에도 줄 서는 가게와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골목을 약간 비껴 걷게 되었다. (아무리 맛있는 커피라도 30분 웨이팅은 나를 회피형 인간으로 만든다..) 그렇게 핫한 골목을 약간 벗어나 걷다가 만난 한 공방에 우연히 들어섰다. 안쪽으로 슬쩍 볕이 부서지는 작업실이 보이고 직접 만드신 듯한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과 액세서리들이 정갈하게 정리된. 지금 계절의 나무 색이 잘 보이는 큰 창과 빨간 벽돌이 있는 공간.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뿐인데 전시된 도자기와, 금속, 가죽, 섬유 등 다양한 공예품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설렜다. 


조용히 구경 후 산책을 돌다가 해 질 무렵 그 골목을 다시 들어섰을 때 조용히 앞길을 쓸고 계시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예순 쯤 되셨을까. 편안해보이는 린넨 옷을 입고 천천히 비질을 하는 공방 주인의 저런 모습까지가 저 공간을 완성한다고 생각했다. 거기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고 저녁이 되어 서순라길에서 마신 수제맥주가 너무 맛있었어서 공방에 대한 감상은 금방 잊고 있었는데 방금 생긴 사건으로 그 분위기가 뇌리를 스쳤다.


냉동실이 고장 났다. 정확히는 냉동실의 레일이 고장 나서 바스켓을 밀어 넣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참 어이가 없는 것은 밀프랩을 냉동으로 보관하는 것이 꽤나 합리적으로 느껴져서 얼마 전 냉동용기를 잔뜩 사놓은 데다 토마토 5kg을 소분해 놨고 바질페스토까지 24구 용기에 맞춰 착착 정리를 마친 하필이면 지금.

냉동실의 레일이 고장 난 것이다. 

왜 하필, 왜 지금 이런 일이? 마음속 단 하나의 의문을 가지며 무식하게 힘을 써서 바스켓을 밀어 넣었다. 냉동실에 내장된 플라스틱 레일은 더 구겨지듯 파손되고 나는 이 사태가 갈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참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는 건지 마침 일요일이라 AS도 불가능. 출장 예약은 다음 달 둘째 주까지 넘어가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냉동실에 보관해야 할 음식은 어떡하지. 점점 이성을 잃어가며 바스켓을 밀어 넣다가 급기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꽥 소리를 질렀다. 


요즘 들어 주변에 다정할 여유도 없이 마음이 가난해져 버린 기분이 들었는데 이런 일에도 감정 컨트롤이 어렵다니. 갑자기 왈칵 더 슬퍼졌다. 냉동실에서 꺼내진 것들의 포장재에 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허망하게 앉아있다가 문득 우아하게 비질하던 그 공방의 작가님이 떠올랐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곱게 나이들 수가 없는 건가. 차분하게 비질하던 그분의 표정이 상기되니 왠지 천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바스켓을 들어 아래칸부터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허무할 수가. 레일은 고장 난 게 아니라 방향이 잘못된 거였다. 한 칸만 아래로 밀어 넣으면 편안하게 넣을 수 있었던걸 맞지 않는 칸에 억지로 밀어 넣고 있던 거였다. 


최근 일상에서 겪은 몇몇 일들이 이런 식이었다. 계획과 질서를 위해 노동력을 쓰다가 결국은 무계획, 무질서로 일이 처리되고 마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위해 만들었던 편리한 방식은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다. 음식을 소분하고 요리를 계획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으면 되었을 텐데.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화낼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나 좋자고 하는 일에 화살을 쏘고 있나. 조금 더 내 일상에 사려깊고 다정해져야겠구나. 그래도 언젠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가구나 가전에 짜증이 솟을 수도 있겠지만. 

건강하게 에너지를 채우며 휴식하고 싶다. 

여러 말을 하면 피곤하고 복잡해지니까 그거 딱 하나만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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