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혜 Feb 08. 2022

사인회

단편소설 2 화

 이십 분은 일렀다. 로드뷰로 훔쳐본 건물 앞이었다. 벽은 투명했다. 붉은 글자가 이곳저곳 붙었다. 크고 굵은 한자 한 자였다.

 약(藥).


 십 분 정도 쪼그렸다. 안쪽을 곁눈질했다. 대기용 의자가 다섯 줄이었다. 상영관처럼 놓였다. 왼편은 접수대였다. 검은 사람 하나였다. 앞치마를 걸치고 섰다. 오른편은 복약 창구였다. 흰 사람 둘이었다. 가운을 입고 앉았다. 온화는 단화 끝을 톡톡거렸다. 마스크에 덮인 코끝은 붉고 축축했다. 목도리를 고쳐 맸다.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한 번 삐끗했다. 두 번째에 열렸다. 윗입술이 쭈뼛거렸다. 들키기 싫었다. 부러 쾌활하게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약학대학 실습생입니다.


 눈 세 쌍은 초점을 맺었다. 한 명이 나섰다. 하얀 옷이었다. 온화를 인도했다. 커튼을 걷었다. 익숙한 채도였다. 깊은 남색 테이블이었다. 약학관 실험실에서 본 듯했다. 한산했다. 산만하기도 했다. 바빴던 어제를 지우지 못하고 오늘을 맞이한 흔적이 보였다. 삐뚜름히 꽂힌 용법 용량 스티커. 왁자하게 헝클어진 시럽 병. 미처 털지 못한 약 가루가 넌지시 일렀다. 여기가 조제실이야.


 주방 같은 곳이었다. 공간의 존재와 쓸모를 알아도,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 못 하는 곳. 바퀴 달린 의자는 넷이었다. 하나에 앉았다. 탁상 아래는 이미 가득 찼다. 상자 여럿이 떡하니 자리했다. 포장을 채 뜯지 않은 약이었다. 다리 넣을 공간은 없었다. 발을 작게 굴렀다. 의자는 도르륵 움직였다. 머리를 짧게 굴렸다. 여기서 뭘 할까. 생각은 읽혔다. 설명을 들었다.

 ― 주차 별로 업무가 다릅니다. 이번 주는 약 봉투를 씁니다. 수기로요.


 온화는 의아했다. 이십 일세기에 손으로 봉투를 쓰나 싶었다. 프린터는 어디에 두고. 이유는 나중에 알았다. 아픈 사람은 많았다. 매 끼니 약을 먹었다. 한 움큼을 오래도록. ATC(Automatic Tablet Counting, 자동 정제 포장기)는 처방 약을 뱉었다. 백 팔십 포 아홉 알. 얼핏 두루마리 휴지로 보였다. 두텁게 만 모양새였다. 작은 종이봉투는 깜냥이 안 됐다. 큰 종이봉투나 비닐은 간신히 버텼다. 사람이 쓰는 게 빨랐다. 실습생은 값싸고 느린 노동력이었다.


 단순한 처방부터 맡았다. 처방전을 봤다. 봉투에 환자분 성함을 적었다. 용법을 표시했다. 날짜를 썼다. 넘겼다. 다음 처방전을 봤다. 반복했다. 종일 남 이름을 갈겼다. 일자를 날렸다. 우스웠다.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팬 사인회 날인 거지. 성함이요? 네, 오늘도 건강하세요. 유성 매직은 하얀 가운 왼쪽 가슴에 처음으로 꽂혔다.

이전 01화 무궁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