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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레모스 May 26. 2024

우리 집에는 15년째 티비가 없습니다

전형적이지 않게 살기

1. “그럼 집에서 뭐해요? “

집에 티비가 없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거실 벽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벽걸이 티비, 그리고 맞은편에는 소파가 있는 모습이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풍경이기에 그렇겠죠.


2. “대단해요!”

또 다른 이들은 뜬금없이 감탄을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 티비없이 희생하며 사는 부모라고 갑자기 칭송해 주는 듯한 느낌이라 우쭐하기도 하다가 그럴 일인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3. 돌이켜보면 신혼 초부터 남편과 저는 티비를 사지 않고 첫 살림을 꾸렸습니다. 오랫동안 자취를 했던 저에게 티비는 사치였고, 남편도 딱히 티비는 보지 않는다고 해서인지 우리 집에서는 필수품이 아니었습니다. 티비가 아니어도 우리 신혼집에는 없는 게 많았어요. 소파, 침대, 화장대 등등. 말 그대로 단출했네요.


4. 티비가 있는 사람들은 집에 있는 많은 혹은 일정 시간 동안 티비를 시청하거나 켜두던데 우리집은 티비가 없으니, 대화를 하거나 음악을 틀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아닐 때는 책을 보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며 티비 없는 세상을 마음껏 누빕니다.


5. 일생의 취미가 뉴스 보기, 신문 보기이신 우리 아빠는 요즘도 우리 집만 보면 답답하다는 듯 말 끝마다 “티비가 없어서 세상 물정을 몰라.”라고 하십니다. 딸내미가 무려 최첨단 산업인 IT 회사에서 팀도 꾸리고 영업도 하고 있는데 말이죠. 은근 구두쇠이신 아빠는 심지어 제가 얼마 전 이사를 올 때 티비를 사주겠다고 인심을 쓰며 말씀하셨어요. 그때 우리 아이들이 “티비 필요없어요 할아버지.”라고 아주 당차게 말해주어 재미있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답니다.


6. 그럼 우리 집 거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소파는 있습니다. 소파 맞은편에는 피아노가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선반이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트램폴린(어른용)이 있네요. 소파 왼쪽으로는 책장과 원형 테이블이 있고 오른쪽은 텅 비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거실이 나름 광활합니다.


7. 우리 가족은 거실에 모여 여러 가지를 합니다. 스툴이나 소파에 앉아 큰 아이는 우쿨렐레를 연주하거나 종이 신문을 읽습니다.  작은 아이는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로 밀리의 서재 책을 읽거나 영어 게임을 합니다. 남편은 원형 테이블을 차지하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일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누립니다. 나는 주로 소파에 누워 어깨 마사지 기계에 몸을 맡기거나 빨래를 갭니다. 제일 자주 등장하는 풍경은 어쨌든 책 읽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거의 10년째 보는 우리 집 거실풍경입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책들과 이야기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무아지경


8. 티비가 없이 자란 우리 아이들은 그래도 다행히 왕따를 당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어려움을 겪진 않습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나 유행어가 궁금하며 빠르게 검색해 유튜브나 넷플릭스로 보여주면 되니까요. 요즘은 아이패드로 웬만한 걸 다 할 수 있으니, 하루 30분에서 1시간은 넷플릭스를 통해 스트레스 해소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기도 합니다.


9. 티비가 없이 자라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창의적이거나 집중력이 좋을까요? 저는 사실 객관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미디어 의존도가 매우 낮고 심심할 때 스스로 뭔가를 잘 찾아 하는 편이라는 겁니다. 사부작사부작 양말목으로 뭘 만들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두 아이는 항상 바쁘더라고요.


10. 티비없이 자란 6학년은 일단 이렇습니다.

- 종이 신문을 거의 매일 꼼꼼하게 읽는다.

- 잡지 보는 걸 좋아한다.

- 책을 안 읽는 날은 없다.

- 유튜브는 양말목 만들기, 우쿨렐레 연주, 웃쏘를 주로 본다.

- 욕을 안 한다.

- 유행에 둔감하다.

-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항상 집에 두고 다닌다)


11. 티비는 가전제품의 일부이지만, 집의 환경과 분위기에 결과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평범한 듯 특이한 우리 집은 티비없이 오늘도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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