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대로 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방 끈의 길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잘못이다. 많이 안다는 것, 특별히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반향을 일으킬만한 앎이라고 한다면 자신보다는 타인의 취향에 맞춰지게 된다. 누군가 앎을 통해 부와 힘을 추구한다면 이미 자신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는 무언가의 줄에 꿰어 이리저리 춤을 추는 꼭두각시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누군가 이런 상황에서 헛구역질을 해댄다면 그는 실존의 가능성을 가진 자다. 왜 구역질이 나왔는가. 자신이 누군가의 춤사위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내가 아니다. 확고했던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혼란함과 배신감이 물밀 듯 밀려온다. 불안이 계절풍이 되어 거세게 불어넣고 있다. 그것은 속 깊은 나의 울림, 나 자신의 소리이다.
양심의 속성은 힘이다. 당기는 힘보다는 밀어내는 힘 말이다. 구역질이 밖으로 쏟아내려는 욕망이듯 양심은 그것을 부추긴다. 왜인가. 왜 나의 속마음은 용암처럼 솟구치려 하는가. 폭발적인 힘이 없으면 나는 껍질에 머물러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예 짓인지, 동물짓인지 특별히 의심하지도 않고 오히려 익숙하고 평화로운 삶으로 수탈당하지 않게 지키려들 것이므로,
양심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다만 믿는다. 이는 신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따라서 칸트의 말마따나 신과 양심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의목소리를 지나치게 인격화하고 동일시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해악이다. 결국 그 자신이 신을 참칭 하게 될 테니까. 그럴 때는 신을 포기하고 철학자로 남기를 바란다.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고뇌하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사람이기를.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통찰은 "사랑은 절대 의식의 현상으로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면서 가장 자명하다"고 생각한 야스퍼스의 생각과 협력할 수 있다. 사랑은 무한한 가능성이 도취에 이르는 타락으로, 감성적 열망을 향락으로, 공명성을 추구하는 앎의 욕구를 공허한 사고로 이끄는 원동력이라서 치열한 투쟁 없이는 오로지 나르시시즘만 남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을 가장 설득력 있게 대변할 수 있는 단어는 '아이러니 일지도 모른다. 나의 껍질과 속살의 공존과 결별, 소통과 투쟁의 극단성과 이중성을 무엇으로 담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헛헛하고 이죽거리는 것이 아이러니는 아니다. 모순이야말로 나, 즉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호탕한 척하고, 시선과 포상을 의식하며 이타적인 체하는 비겁하고 얍삽한 나를 흔들어 불안에 빠뜨려주기 때문이다.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의 한구석에 창피함이 있다. 이것 또한 불안 못지않게 이런저런 모습으로 나를 압박한다. 누군가 눈감아주어도 거울에 비친 쪽팔린 나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안다. 언급한 대로 거짓된 소통이나 조건을 내건 이타적 행위가 들켰을 때는 치명적이다. 전자와 달리 감추고 싶었던 것이 드러나 버렸기 때문이다. 이럴 때 창피당하지 않으려 침묵하고 거리를 두려고 한다. 하지만 쪽팔림은 잠시다. 곧 한계를 뛰어넘는 역동이 되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