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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isopher Nov 23. 2021

칸트와 MZ경찰

제22회 경찰문화대전 '산문' 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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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던 한 여름의 중앙경찰학교, 난데없이 ‘하안거夏安居’를 맞게 된 신임 경찰 후보생들에게 적보산과 그 자락은 속세와 ‘선계仙界’ 사이를 긋고 서있는 ‘일주문一柱門’ 그것이었다. 산속 거처에 고립된 수도승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듯 경찰 후보생들도 참 경찰이 되기 위해 실무능력과 경찰정신을 갈고닦는다. 허나 수도자와 달리 고립과 단절을 원하지 않았을 그들에게는 숨 트임이 절실했다. 마침 거기에 응답하려는 듯 중경에서는 동아리를 활성화해보기로 마음먹는다. 교수요원이라면 누구나 동아리를 열 수 있게 하였는데 단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을만한 실무적인 것’과 ‘최소 20명 이상의 후보생들이 모여야’ 하는 것으로 인가 조건을 내걸었다. 여기에 충족했을 때, 운영자인 교수에게는 성과금을, 참여한 후보생들에게는 가점 부여라는 혜택도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 확 펴질 만한 금액도, 첫 근무지 선택에 결정적 한방을 줄 것 같지도 않은 점수인데도 서로에게 동기부여가 되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동아리 홍보를 위해서는 온 택트 시스템이 동원됐다. 대강의실 무대에 선 교수들이 돌아가며 자신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띄우면 그 장면을 메인 카메라가 각 강의실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던 후보생들에게 전파한다. 흥행은 성공적이었다. 테이저 VR, 풍속영업 단속요령, 무도, 교통수신호, 공문서 작성, 무전기 작동, 위기협상, 수사기법 등, 온갖 전문분야가 망라된 박람회장 같았다. 후보생들 입장에서는 더욱 흥미로웠을 것이다. 경찰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인가. 교수들의 입담과 쇼맨십이 더해서 인지 일찌감치 만원사례를 보인 곳은 물론, 교차 지원에, 눈치작전에, 교수 연구실 앞에 진을 치거나, 애절한 모습으로 사정하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동아리 ‘가입 전加入戰’이라 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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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경찰학교는 ‘시민인 후보생들을 경찰관이 되도록 돕는 곳’인 만큼, 그들에게 ‘가치 지킴이’로서 경찰관을 보여주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육현장 맨 앞에 서있는 교수요원은 어떤 마인드로 그들과 호흡해야 하는가. 실무분야에 최고가 된다고 하더라도 후보생들의 가슴은 다 채워지지 않으리라. 그 기술만으로는 다양한 현장 속 인간들의 처지를 헤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MZ세대가 아니던가.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만 관심이 있고, 그래서 불공정에 민감하고, 복잡한 것 싫어하고, 짧고 감각적인 영상 위주의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라지 않는가. 이런 이들에게 경찰의 심장을 어떻게 이식할 수 있을까. 경찰은 국민들을 위해 산다. 그러므로 경찰의 교육은 ‘휴머니즘’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휴머니스트’ 따위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마대자루에 담아 창고 한 구석에 쌓아놓고 있다. 허나 세상이 두 쪽 나도 경찰은 이타적 존재이며 무엇보다 경찰 스스로가 인간이지 않은가.


이런저런 상념이 떠나지 않았으나 결심은 섰다. 조직 내 최첨단 인프라 도입만큼이나 시급한 일이 경찰의 인문정신 회복인 것이다. 이렇게 동아리 신설 대열에 합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칸트 읽기’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리고 저 이름에 걸맞게 임마누엘 칸트를 멘토로 삼았다. 그는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가치를 최고조로 이끌어 왔던 인물이다. 난해하기로도 1~2위를 다툴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동시 도덕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고 ‘목적’으로서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칸트와 호흡해보는 것이 미래 경찰들의 생각과 행동 의지에 얼마만큼의 동력이 되어줄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명을 위해서든 밥벌이를 위해서든 이 바닥에 겁 없이 뛰어든 경찰 후보생들의 손을 칸트는 붙들어 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되고 싶었던 ‘경찰의 원형’을 찾아 나서도록 독려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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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례다. 독보적 콘텐츠와 언변으로 일찌감치 매진을 예약해 둔 동아리들을 뒤로하고, 조심스레 무대에 섰다. 그리고 책 한 권을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5분 동안 2천여 명의 시선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 차가워진 손바닥에 땀이 미끈거렸다. “진정한 경찰이 되고 싶은 사람, 나와 칸트를 읽읍시다!” 누구는 빵 터뜨리며 웃었고, 누구는 노려보고 있었으며, 누구는 바닥을 쳐다보았고, 누구는 옆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칸트가 19세기 초반에 묻혔을 때 ‘진정한 경찰이 되고 싶냐’는 말 또한 함께 묻혀버렸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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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 명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동시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후보생들의 얼굴을 욕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 반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아요.” 인기 높은 동아리를 맡고 있던 어느 교수의 말이 나의 미몽을 흔들었다. 이제 데자뷔로 덮인 수풀에서 나와야 했다. 아무리 뜻이 좋았어도 칸트라니 역시 무리였던 것이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고 더군다나 써먹지 못할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삶의 섭리와 진리가 가변적이고, 가치관이 변하는 것을 보며 변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일까 항상 고민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신청 사유와 함께 한 명의 후보생으로부터 가입 희망 문자가 왔다. 이런 걸 두고 ‘드라마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를 필두로 마감 전에 두 명, 마감 직후에 한 명이 부랴부랴 합류했다. ‘4명’, 구름 떼는 아니었지만 중경을 덮어버리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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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티 OT의 날이다. 책상을 펜타곤 모양으로 만들어 둘러앉았다. 에코가 퍼질 만큼 강의실은 공허했다. 침묵을 깨야했다. 쓸모 있는 실무 동아리가 아닌 왜 ‘칸트 읽기’였는지 물었다. 실무는 나가서 하면 된다고 한다. 다른 동아리는 가점을 주지만 여기는 없다고 했다. 가점 ‘까이꺼’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가점이 나중에 경찰서 선택할 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자신들이 알아서 챙기겠다고 한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MZ세대의 공식이 전혀 들어맞지 않은 MZ세대들이었다. 어리석었다. 설사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틀에 가두고 판단하다니 얼마나 한심한가. 하지만 그들의 의지를 확실히 해야 했으므로 선전포고를 했다. “수업은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즉 매주 한 명씩 돌아가며 해당 파트의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려면 모두가 같이 읽어야 하고 자신만의 글도 제출해 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이니 나갈 사람은 나가라는 압박이었다. 그들은 웃었다.


이윽고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먼저 시작한 후보생은 체육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평소 삶의 의미가 궁금했다는 그는 수험 준비 때문에 잊고 살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찾고자 팔을 걷어붙였다고 한다. 다음 후보생은 로스쿨을 준비하며 법학의 뼈대인 철학에 관심이 있었고, 평소 어떤 어려움도 성장하는 과정으로 의미를 부여해 왔다며 종교인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계속해서 다음 후보생은 영화 관련 글을 써왔으며 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정교한 글을 쓰고 싶다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마지막 후보생은 사랑과 성공에 대하여 숙고 중이었다. 세상의 기준과 자신의 가치를 사이에 두고 적잖게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의미 찾기에 목말라 있었던 모양이다. 이들의 면면을 보아하니 이제는 무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로 간의 벽이라는 것도 그 사이 무너져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칸트가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는데 그의 후광은 이다지도 셌던 것이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개구리 노래하는 여름밤, ‘인간’과 ‘사랑’을 철학하고 있을 경찰들을 생각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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