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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란 Sep 27. 2021

아빠와 샤인머스캣


추석을 맞아 본가로 내려간 날, 아빠는 퇴근길에 샤인머스캣을 사가지고 오셨다. 예란이 왔다며.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식탁에 탐스러운 샤인머스캣이 들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엄마는 어머, 이거 비싼 건데. 예란이가 좋아하는 거라고 아빠가 사 왔나보다, 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아빠, 나는 단 한 번도 샤인머스캣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고 실제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아. 라고 읊조렸다.


다음 날 밤, 아빠는 회사에서 많이 취해 돌아오셨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며 이제껏 술을 마신 거겠지. 아빠는 침대에 누워 나보고 이리 와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위일청’이니 ‘닐 다이아몬드’니 7080세대 가수들의 노래를 틀어보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그 시절을 호령했던 옛 가수들의 노래를 인터넷에 검색해 틀었다. 낯설고 귀에 익지 않은 음들이 작은 방을 꽉 메웠다.


아빠는 젊었을 때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생각했다. 아빠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아빠는 20대 때 이런 음악을 들으며 하숙집에서 낭만을 즐겼겠구나. 그에게도 낭만이 있었겠구나. 건강하고 튼튼한 육체를 가지고 꿈과 희망을 짊어진 채 앞으로 나아갔었겠구나. 당신에게도 그 시절의 취향과 낭만과 멋이 있었고, 잘 설계된 장래가 있었으며, 사랑과 좌절과 실패와 성공이 있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를 바라봤다. 건강하고 무서울 것 없던 젊은이는 어디가고 지금 이렇게 백발의 노인만 남아있나. 팔다리에 근육이 다 빠진, 매일같이 술에 취해 잠드는 노인. 그 옛날 부산대학교 공대를 나와 대우건설에 합격해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사람이, 언제부턴가 사업에 손을 대 집과 차를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의 사랑과 화목을 잃고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잃고 남편으로서의 신뢰와 위신을 잃고 지금 이렇게 작은 골방에서, 집도 절도 없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걸까. 그 과정에서 그는 무엇을 지키고 싶었고 무엇을 각오했을까.


나는 아빠의 자는 얼굴에서, 옛 사진 속 그가 산 정상에서 활짝 웃고 있던 젊은 날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친 얼굴 위에 싱그럽고 자신만만한 얼굴이 겹쳐져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우리를 가난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엄마를 신용불량자로 만들고 매일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고 험한 말을 하는 괴물이 아니라, 한 때 취향과 낭만을 가졌었던 평범한 사내의 얼굴을. 늙고 지친, 이제는 노년에 들어선 한 가장의 얼굴을.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샤인머스캣 한 송이를 챙겼다. 평소 같았으면 반찬이며 필요한 물품들을 이것저것 싸왔겠지만, 그날은 왠지 샤인머스캣 한 송이로 충분할 것 같았다. 내가 실제로 좋아하는 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가 날 위해 비싼지도 모르고 사온 청포도. 나는 아마 집에 도착해 그 달고 상쾌한 것을 입안에서 굴리며 맛볼 것이다. 얇게 싸인 껍질 속의 탱글한 알맹이에는 그가 옛 시절 바라왔던 그의 모습과, 현재 그의 모습이 나란히 겹쳐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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