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있던 자리
심심하다. 무료하다. 원래 나는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심심하다’라는 원형의 감정을 잘 느껴본 적이 없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초등학교 때는 아예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다닌 학원은 5개가 전부다. 친구들이 학원에 가고 난 후 남은 아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혼자서도 잘 노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때의 내공으로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가 되었다.
키우던 강아지 정호가 떠난 후로 나는 자꾸 심심하고 무료하다. 회사가 끝난 후, 집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기네. 퇴근 후 시간을 부지런히 쓰려면 쓸 수 있구나,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근데 예전에는 뭐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빨리 갔는지,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너와의 산책을 미뤘는지 모르겠다.
정호가 떠난 후의 일상은 똑같았다. 새벽 내내 울어도 너무나도 평온하게 해는 떴고, 울다 지쳐 1시간밖에 자지 못해도 늦지 않고 출근했다. 졸린 것을 꾸역꾸역 참아내고 일을 쳐냈고, 불과 3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허하게 울던 나는 회사 사람들이랑 웃으며 점심도 많이 먹었다. 어떻게 나의 식욕은 감정에 전혀 지배받지 않는 부분이 의아했다.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 사람들이랑 웃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다. 네가 지금 내 옆에 없는데 나는 이렇게 잘 웃고 있구나.
네가 떠난 지 1년이 넘자 허무하게도 네가 없던 빈자리가 이제는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오면 너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해지기도 했다. 어릴 때는 달려 나와서 반겼던 것 같기도 하고, 7살~9살 즈음에는 걸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늙어서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네가 죽기 전에는 얇아지고 작아진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미끄러지면서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내 기억은 조각조각이다. 흐릿하기도 하고. 사실대로 말하면 너와의 일상이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평범하고도 소탈한 하루하루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래, 너는 그냥 늘 몇십 년씩 그 자리에 있는 장롱이나 티브이 같았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너도 밥을 먹고, 우리가 잘 때 같이 자고, 정말 너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요즘은 나와 정호가 정말 함께 살았던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사진에 이렇게 네가 이렇게 네 발로 서 있는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요즘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들, 자전거 앞주머니에 앉아서 바람을 마음껏 맞이하는 강아지들, 카페에 보호자 옆에 안겨 있는 강아지들, 호텔에서 같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들, 보호자와 같이 서핑을 하는 강아지들, 같이 캠핑을 가는 강아지들, 해변과 한강 강가에서 뛰노는 강아지들, 눈을 돌리면 반려인과 행복해하는 강아지들이 많이 보인다. 정호는 늘 나와 집에만 있었다.
이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차를 살 수도 있고, 반려견 동반 호텔을 돈을 더 내서라도 갈 수도 있다. 일부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도 않는다. 네가 아닌 부질없는 인연들에, 무엇에, 그렇게 시간을 할애하고 집착하고 매여있었을까?
나는 이제 돈이 있고, 더 이상 인간관계에 미련이 없는데, 이제야 사회생활에 적응해 회사 끝나고도 좀 체력이 생겼는데, 너와 모든 것을 함께 할 준비가 됐는데, 장장 16년에 걸쳐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이제는 네가 없다.
네게 수영 한번 못 시켜준 내가, 바다 냄새를 못 맡게 해 준 내 자신이 너무 밉다. 16년 동안 조금 더 노력하면 할 수 있었던 일들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이 가장 후회스럽다. 정호, 너와 특별한 추억 하나 없는 게 나는 정말 슬프다. 생생하거나 강력한 추억 하나 없어 네가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서 더 서글프다.
정호 네가 내 옆에 있었는지, 너와 함께하는 동안 우리는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나는 늘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 곁에 정호가 있었던 것이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