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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May 24. 2024

이유 있는 괴성 더 크게 울어라

넌 나의 친구야


유난히 드럭 드럭 큰소리가 난다.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불안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이 분위기가 두렵다. 왜 그러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손으로 진단해 보니 이 정도면 중증은 아니다. 일시적인 충격이라 생각하고 소리에 너무 예민해하지 말자. 스스로 조용해질 때를 기다려 본다. 지금까지 잘 버텨주었으니까 이대로 좀 더 길게 살아남기를 바랐다.


깜박 잊고 있었더니 스스로 조용해졌다. 음 그렇지 역시 별 문제없었군. 상큼한 맛을 생각하며 며칠 전 데쳐 둔 두릅을 떠올렸다. 한가닥 잡는 순간 어, 이건 아니지 이럴 수가 없다. 이렇게 쉽게 상할 두릅이 아닌데 단단함과는 거리가 멀다. 물컹한 두릅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통이다. 아 아쉽다. 진작 먹었어야 했는데 건망증이 문제다.


그다음으로 요거트가 담긴 옥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전혀 냉기의 혜택을 받지 못해 미지근하다. 아차,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들며 점검 들어간다. 냉동실은 빵빵하게 잘 돌아가고 있지만 냉장실은 역시나 고질병 재발이다. 뭐가 문제일까. 정확한 병명도 모르면서 뜨거운 물로 냉동실 바닥에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고 말끔하게 치웠다.


신개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십오 년이 넘게 사용했으니 한계가 왔다. 더 이상 현역으로 빵빵하길 바란다는 건 관절염 걸린 노인에게 마라톤 완주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오랫동안 그 자리 지키며 묵묵히 일한 너에게 한해만 더 일해주길 바랐으니 과한 욕심이었다.


시작한 김에 냉장실 문짝을 열어젖히고 정리한다는 것이 일을 더 저질렀다. 부지런히 설치다가 계란 꽂이를 둘러엎어 계란 한 판을 다 깨버렸다. 황당한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 숨쉬기조차 힘들어 헐떡거리는 이 친구를 더 이상 붙들지 마세요. 이제 안 됩니다. 보내 주세요.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 같다.


뭐가 되는 게 없는 날이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깨지고 터진 달걀의 처참한 최후. 흐미, 미끄덩거리는 이 느낌. 팍 부숴버린 달걀 한 판도 아깝지만 그 뒤처리가 더 힘들다. 하나 둘도 아니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흰자와 노른자의 흐느적거림. 그 틈새에서도 까칠하게 제자리 지키려는 껍질의 안간힘까지 그 모양이 가관이다. 손과 발 냉장고와 주변 바닥까지 우리 모두 계란 마사지 한번 잘했다.


정리정돈을 마친 후 몇 시간이 지나고 나니 냉장실도 차가워지며 제대로 돌아간다. 하지만 얼마나 제기능을 잘할지.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이 친구에게 쉼을 주자. 오랫동안 정들었던 내 친구야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정든 만큼 헤어지기란 아쉬움이 앞선다.


영원히 함께할 순 없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친구를 밀어내고 새 친구가 들어온다면 집안 분위기는 어떻게 달라질까. 괴성을 지르지 않을 테니 조용해지겠지. 살인적인 무더위에도 동동거리며 애쓰지 않고 시원한 냉기를 즐기며 돈맛이 좋다고 하겠지. 그날이 언제일지 그때까지 너는 골골거려도 역시 내 친구야.




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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