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이 되려면 무슨 조건을 갖춰야 할까?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되어있다면 다른 필요조건은 알아서 따라오든 부족하면 본인이 알아서 준비하게 되어 있다.
크루즈 업계 전체의 승객에서 한국인의 비율을 고려하면 선사는 한국인 승무원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승무원으로서나 승객으로서나 한국인은 레어템이다. 레어템으로서 엄청나게 뛰어나지는 못해도 동료나 승객에게 긍정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큐나드 선사의 경우 5천 여명의 승무원 중 한국인은 1명, 바로 나 혼자이다. 일반적으로는 각 크루즈선 당 한국인 승무원은 1~3명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한국인들은 웬만하면 일을 잘한다. 많은 외국인들이 덜 똑똑한 데다가 게으른 터라, 더 잘하는 사람은 혼자서도 몇 명분을 거뜬히 일한다. 그러다 보면 주목은 있는 대로 다 받기 일쑤이다. 능력을 알아봐 줘서 대우받게 되는 거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혼자라서, 그런데 잘하니까 더 튀어서, 그래서 오히려 쉽게 질투의 대상이 된다.
내가 아무리 잘해보려 해도, 나쁜 의도가 전혀 없어도, 그저 할 일을 열심히 한 것뿐이어도, 어디 가나 안 맞는 사람이나 못된 사람은 있다. 고등학교 선배들의 괴롭힘, 일본어학교 50대 아줌마 담임 선생님의 질투, 교회 유학생 및 집사님들의 질투, 남자 상사들의 성희롱, 고객사들의 성/나이/국적 차별, 장기근속자 싱글맘의 괴롭힘, 직책을 이용한 성적 접근 등, 수없이 당하고 대처하고 버텨왔다.
그런데 이게 떼거지로 덤비면 속수무책이다. 배에 따라 영국, 유럽연합국, 남미, 남아프리카, 필리핀, 인도 등 상당수를 차지하는 국적의 떼 집단이 있다. 많게는 전체 인원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수백 명, 수십 명 있는 것은 기본이다. 누군가와 무슨 일이 있었든 그래서 싫든 좋든 간에, 그 사람과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근무한다. 더군다나 그 사람을 웃는 얼굴로 최선을 다해 대응해야 한다. 그 사람도 안 내리고, 나도 안 내린다.
그러니 여기서 정신력이 못 받쳐주면 절벽에서 떨어져 나가듯, 배에서 버티지 못하고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굳이 거창하게도 대한민국 민간 외교관으로서의 책임감을 운운하는 것이다. 그러면 때로는 정말 말도 안 통하고 못 알아듣겠고 외로울지라도, 예상치 못한 힘든 일이 생길지라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내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글 속에서 나에게 힘이 되는 좋은 친구가 생기기도 한다. 이 친구라면 평생이라도 같이 일하고 싶고, 뭐든 돕고 도움을 구할 수 있고, 밤을 새우며 와인잔을 비울 수 있고, 오랜만에 내린 육지에서 함께 맛보는 시간이 꿀 같고, 음식은 더없이 맛있다. 나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어디서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크루즈 승무원은 영양 떼의 기습도 비인격적인 스카의 공격도 받는다. 무파사의 죽음으로 비롯된 오해와 갈등, 슬픔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딛고 일어나면서 듬직한 내편들도 생긴다. 어떤 자리에서든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