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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자몽 Oct 14. 2024

점수 맞춰간 자의 국문과 적응기(2)

청자몽 연대기(10)

앞으로 졸업하면 뭘 하면서 산다지? 는 둘째치고 어떻게 학교를 다니지? 앞이 캄캄했던 자의 열 번째 이야기 :




1학년 여름방학
재수를 포기하고 일단 컴퓨터 학원 등록


이틀 비 오더니 거짓말처럼 갰다. 하늘이! ⓒ청자몽


원래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휴학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반발짝 떨어져서 다니니 점수 맞춰간 학교는 더욱 다니기 힘들었다. 책 많이 읽고, 원래 국문과를 좋아해서 온 친구들하고 차이가 많이 났다. 일단 생각하는 깊이 자체가 많이 달랐다.

그런데, 신기한 게 막상 또 다녀보니 그냥저냥 다닐만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시 대입시험 준비를 한다 해도 더 나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었다. 1학기 마칠 즈음에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는 그러면, 그냥 학교 다니면서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걸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여름방학에 컴퓨터 학원을 등록했다. 보통 여름방학에 많이 하는 영어회화 공부나 운전면허증 따기는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 학원 가서 컴퓨터 익히는 수업을 두 달 들었는데...

재밌었다.
한글타자와 영문타자도 익혔다. 키보드를 외워서 타이핑하는 걸 해본다고, 타자게임 같은 걸 했는데 재미있었다. 컴퓨터는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로 처음 배우는 거였다. MS-DOS부터 배웠다. (1992년 여름) 생각보다 컴퓨터가 재미있어서, 학원을 계속 다니기 시작했다.

1학년 2학기에 개학을 했지만, 학교 끝나고 종로에 있는 컴퓨터 학원을 계속 다녔다. 2학년 여름까지 약 1년 가까이 다녔다. 학교 다니면서 컴퓨터 학원을 다니는 건 힘들었지만, 다니다 보니 자격증 시험(정보처리기능사)도 준비할 수 있었다. 뭔가 작은 목표가 생기고, 열심히 하게 됐다. 정보처리기능사 2급은 2학년 겨울에 땄고, 정보처리기사 2급은 4학년 겨울에 땄다.

학교 다니면서 제일 재밌었던 건,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ver 1.5 ~2.0) 다루는 일이었다.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단축키를 다 외우고 현란한 편집으로 휘황찬란한 리포트를 만들어 빈축을 샀다.

정작 전공 말고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은 다소 한심한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삶에 뭔가 재미를 찾은 것에 감사했다. 컴퓨터와 국문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지만, 나 나름대로 마음 부칠 접점을 찾은 셈이었다.



정작 전공 수업은


전공수업은 쉽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아 밑천이 빤한 데다가, 생각의 깊이도 얕았다. 자료조사하고 발표하는 수업도 많았는데... 힘들었다. 리포트를 열심히 썼고, 발표도 열심히 했다.

어떤 황당한 수업교재는, 토씨만 한글이고 나머지는 다 한자어인 교재였다. 공부를 하는 건지, 한자를 공부하는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조선시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따로 사전을 사야 했다. 당연히 고어를 공부하기 위해 사전이 필요했다.

'음성학'이던가?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는데, 나중에 시험 볼 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지에다가 "교수님 죄송합니다. 아는 문제가 없어서, 뒷장에 제가 외운 내용을 적습니다."라고 쓰고, 정말로 뒷장에 사람의 음성기관 그리고 외운 내용을 적은 적도 있다.

노래 가사를 틀리지 않고 다 외우면 시험 면제해 주신다고 하셔서, 열심히 노래 연습해서 불러버린 경우도 있다. 학점은 너무 위화감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주셨다. 그 수업 자체가 버거워서, F 안 받으면 다행이다 싶었던 수업이었다.

위에처럼 했으니, 학점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4.5점 만점에 4.0 가까이 되는 친구들이 아주 많아서, 40명 중에 13명 안에 들어야 가능한 교직이수는 당연히 하지 못했다.

국문과 특유의 유한 분위기 덕분에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수업도 있었다. 날씨 좋고 꽃이 활짝 핀 봄날, 교실 수업 안 하고 학교 뒷산에서 진달래 들고 서로 느낌을 이야기한 수업이 생각난다. 그날 내친김에 뒷산 끝까지 올라가서 암자에 갔다. 학교 뒷산에 암자라니.. 정말 황당했다. 암자 갔다 온 날, 후기 써올 사람으로 낙점이 되어 후기를 쓰기도 해서 더 기억에 남는다.

보통 현대문학이라고 해도 (1990년대 초반에) 1950년대 문학을 공부했는데, 아주 최신 현대문학(1980년 이후)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매 수업 시간마다 복사해 주신 단편을 읽고 느낌을 이야기했다. 그때 중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국현대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작문을 따로 수업시간에 배우지 않았지만, 문법시간인가? 어느 수업시간에 배운 문장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한 문장을 쓰고, 조사를 바꾼 다음 달라진 느낌을 나누었다.

예를 들어,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당신 사랑합니다.

등으로 바꾼 다음, 각 문장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조사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우리말이 참 미묘하게 아름다운 것 같다.




어쩔 수 없을 땐,
일단 그냥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재수할 자신이 없어서,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지만 다니다 보니 정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니다 보니 먼지 쌓이듯 쌓여가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됐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수업 몇 가지를 적고 보니, 그래도 점수 맞춰갔지만 뭔가 남긴 남았구나 싶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았네 싶기도 하다.

잘 모르겠고, 어쩔 수 없을 때는 일단 그냥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비록 그 길이 최선이고 최고의 길이 아닐지라도... 우직하게 꾸준히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는 것 같다.


원글 링크 :






저의 두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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