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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자몽 Sep 26. 2024

20년 동안 계속 반복됐던 악몽 (하)

딩동댕! 나의 실패이력서(4)

산 넘어 산


운이 좋아서 서른 초반까지 경력을 쌓아가다가, 32살에 남편과 동시에 취업비자(H1)를 받고 미국에 일하러 가게 됐다. 꽃길만 걷게 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서 1년이 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회사를 구해야 했다. 악몽은 계속 됐다. 미국에서 나 같은 외국인에게 취업비자를 서주는 회사를 6개월 안에 구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미국 간다고 좋아하면서 떠난 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야 하나 고민이 됐다.


계속 알아보고 또 알아보다가 극적으로 다시 취직이 돼서 주(State)를 이동하게 됐다. 남부에서 동부로 4일 동안 짐을 싣고 트럭을 타고 이동을 했다. 그러면 다 끝난 것인가? 아니었다. 이사한 곳에서 잘 적응을 못했다. 남편은 알레르기와 향수병으로 앓아누웠고, 우리의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고민하다가 남편이 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 재취업이 됐다. 남편이 먼저 한국에 들어가고, 나는 남아서 미국 회사 일을 정리하다가 6개월 후에 들어오기로 했다. 6개월 동안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따로 일하며 살았다. 고립된 채로 넓은 남의 나라에 혼자 남았다. 그때서야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은 쫓기듯 살다가 나는 왜 일을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과연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좋을지 그래도 남는 게 좋은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6개월을 보내다가, 남편이 다시 미국으로 왔다. 우리는 과연 잘한 걸까? 아닐까?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고민을 하며, 그렇게 남은 30대를 미국에서 보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를 매일 이야기하며, 남의 나라에서 7년 반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H1도 한번 연장하고, 영주권 신청도 들어갔다.




과거를 놓아주고, 오늘을 살기로 결심하다.


딱 마흔 살 되던 해에, 취업비자와 영주권 진행을 모두 스폰해 줬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됐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때문인지, 아니면 그전부터 힘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격주로 받던 급여가 연체되다가 끊긴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부사장님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서른다섯이면 프로그래머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 되었을 때, 열린 미국행 취업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우리가 마흔이었을 때 일이다. 7년 반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필요한 생활용품과 옷가지만 남기고 모두 다 정리를 했다. 8개의 상자를 가지고 미련 없이 편도행 티켓을 끊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과거를 원망하지 말고, 나는 '오늘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너무 절박한 상황이라 후회 같은 게 더 이상 소용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과정이야 어쨌든 그동안 나쁘지 않게 잘 살았으니, 이만 나를 용서(?)하고 그만 후회하자. 남은 인생 잘 사는 것도 좋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20년간 꾸던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됐다. 내 과거를 용서하는데 장장 20년이나 걸린 셈이다. 좀 더 좋은 학교나 괜찮은 학과를 나왔다면, 취직할 때 여러모로 훨씬 유리했을 것 같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어쨌든 취직 이후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돌아보니 학교 다닐 때 덜했던 공부는 나중에 몇 배 더 열심히 했으니 그걸로 됐다.  


어떤 상태이든, 뭘 하든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는 매우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말이다. 어떻게 하기 어려울 때는 일단 지금 하는 것을 열심히 하고, 할 수 있다면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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