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정리하는 동안, 사람이 아니라 '로봇'으로 살기로 했다.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리하는 일에만 집중한다. 정리를 하다 보니, 뜻밖의 물건들을 발견한다. 이건.. 유물이네.
'정리봇'이 되다.
까마득히 느껴지는 임산부 시절에 받았던 배지와 25센트 동전을 발견했다. 8G짜리 USB도 발굴했다. ⓒ청자몽
모든 게 마음 때문인 거 같아서, 잠시 모든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생각과 감정, 심지어는 마음도 잠시 멈추고 로봇이 되기로 했다. 가져갈 물건과 버릴 물건을 분리하는 '정리봇'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랬더니, 의외로 진도가 팍팍 잘 나간다.
역시 생각들이 문제였나 보다. (좀 일찍 정리를 시작할걸.. /같이 정리하면 좋을 텐데. /이거 다 정리할 수 있을까? /못하면 어쩌지? /이사 가서도 내가 다시 정리해야 할 텐데.. 며칠 걸릴까? /너무 힘들다. /진짜 화난다. /짜증 난다 등등등...)의 생각들을 멈추고, 그냥 정리에 집중했다. 생각할수록 나만 힘들었다. 이왕 하는 거 '그냥'하는 게 도움이 됐다.
늘 해야 하는 집안일(청소, 빨래하고/ 널고/ 개고/ 넣고, 설거지와 그릇 넣기, 쓰레기 버리기, 장보기와 물건 사기, 택배 정리 등등)은 정리하는 일 중간중간에 대충 하고 있다. 못하다가 아이 하원하고 몰아서 하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상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밥이 문제긴 하다. 혼자 먹는 점심밥을 대충 먹은 지는 꽤 됐는데, 뭐라도 먹는 게 다행이다 싶다. 아이와 먹는 저녁밥도 진짜 대충 얼렁뚱땅.. 그래도 뭔가 해서 먹긴 먹는다. 저녁밥 해야 할 때가 제일 늘어져서 힘들다.
이후 아이 씻기고, 10분 공부하고, 책 읽어주고 재우면 고된 하루가 끝난다. 재우면서 나도 같이 잠이 든다. 자다가 눈을 번쩍 뜨면 이렇게 아침이다. 그래도 다행히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떠서, 몇 자라도 쓸 수 있다.
정리봇 생활하면서 스마트폰을 중간에 덜 보게 됐다. 문자 확인 등 짧게 머무는 정도다. 유튜브 보면서 시간이 많이 날아간 거 같아서 좀 그랬다. 스마트폰만 덜 봐도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는 기쁨
정리봇 생활이 건조하긴 하지만, 뜻밖의 물건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하면서 그 물건을 사용하던 시절도 생각난다. 이렇게 오래된 물건이 창고 한쪽에 살고 있었구나.
가져갈 수 없어 버리고는 있지만, 덕분에 옛날 생각이 나서 좋다. 얼마나 더 버려야 할지, 그리고 과연 다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는 동안 뜻밖의 추억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봇도 추억여행을 하는구나. 이런..
아이 보여주려고 꺼내놓은 물건이 다시 사라진다. 아이가 아끼던 장난감들을 버리거나 정리해야 해서 미안하다. 이사 가면 수납공간이 많이 줄어들어서이기도 하고, 물건에 유통기한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아가 때 잘 가지고 놀던 것들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내일은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데, 비 오기 전에 부지런히 가져다가 버려야겠다. 내일도 엄청난 체력전이 예상된다. 이사가 보통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