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네 번째 독백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밤낮없이 몰두하는 직장인 A씨. 오늘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은 채 바쁘게 하루를 보낸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케이크와 와인, 그리고 선물상자를 든 그녀의 친구들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일에 치여 스스로도 잊고 있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생일을 마무리했다.
생일도 잊을 만큼 바쁘게 일하는 직장인이라니…! 돌이켜보면 철없는 생각이지만, 십 대소녀에겐 그 모습이 제법 멋있어 보였달까.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생일이 속한 달이 되면 달력을 힐끔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생일이 오기까지 디데이를 세기도 하고, 생일 아침이 밝으면 동네방네 내 생일을 알리고 싶을 만큼 입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그러니 생일을 잊는다는 것은 나에겐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은 내게 한해를 기쁘게 살아가는 활력소였다.
그러던 중 열여덟 번째 생일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요란스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알람을 끄고 다시 잠에 들었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불쾌하기만 하던 알람소리마저 경쾌했고, 알람 한 번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등교준비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을 뒤로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디에도 미역국은 없었고 구수한 된장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미역 불리는 시간이 부족해서 다른 국을 끓인 걸까? 된장국 한 숟가락을 목 뒤로 넘기며 엄마를 힐끔 보았다. 하지만 조용히 식사를 마친 그녀는 별말 없이 부엌을 떠났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설 때까지 누구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 모두 나의 생일을 잊었구나.’
울적한 기분을 등에 업고 교실에 도착했다. 미역국을 먹지 못한 것뿐인데, 아니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것뿐인데 온몸의 기운이 빠졌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억지 하품을 하며 책상 위에 엎드려 고개를 감췄다.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자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켰다.
‘엄마 나 오늘 생일인데… 혹시 잊었어?’
아니야. 이건 너무 진지하니까, 다시.
‘엄마 나 오늘 생일이야! 까먹었나 봐 ㅠㅠ‘
이건 너무 장난 같은가. 내 속상함은 장난이 아닌데. 다시.
‘엄마 나 오늘 생일인 거 알아?’
‘엄마 오늘 미역국 안 끓여줬어!’
글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기를 수차례. 문자 보내기를 포기하고 핸드폰을 주머니로 던져 넣었다. 문자를 받은 엄마의 마음만 하루 종일 불편할게 뻔했다. 이 정도의 속상함은 나 혼자 삭히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이 말을 걸어왔다. 모두가 까맣게 잊어버린 나의 생일을 언급하며.
‘잊어버릴 수도 있지 뭐.‘
별일 아닌 척 쿨하게 대답했지만 마음과 입술 간 합의가 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뾰로통해진 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일까. 다음날 아침 식탁 위에 미역국이 올라왔다. 소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 미역국이.
입꼬리가 씰룩였다. 안돼, 아직은 표정관리가 필요한데! 잔망스러운 입꼬리를 단속하며 국물 한 모금을 맛보자, 서운한 만큼 저-만치 멀어졌던 입술이 조금, 아주 조오금 되돌아오는 듯했다.
직장인이 된 지 어언 10년이 되어간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그날의 부모님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해소될 틈도 없이 퇴근하자마자 생때같은 자식을 돌봐야 하는 부모님의 고된 하루. 그곳에 내 생일이 들어갈 틈이 없었을 뿐, 생일을 잊었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
(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열여덟 사춘기 소녀의 자존심이 있으니 0.1%의 뒤끝은 마음속 깊고 깊은 작은 곳에 작은 굴을 판 뒤 몰래 담아두는 것으로..!)
나는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 싫고, 옷이 나를 입는 건지 내가 옷을 입는 건지 알 수 없는 추운 겨울도 싫다. 또 한낮과 저녁의 온도차에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헷갈리는 가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반면 봄은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 아닌가. 따스한 봄바람에 괜스레 마음이 간질거리고, 형형색색의 꽃과 달큼한 꽃향기로 오감이 깨어나는 계절. 아, 물론 내가 태어난 계절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한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봄이 왔다. 그리고 나의 생일도 다가오고 있다. 올해는 나를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에게 미역국을 대접할 것이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아낌없이 넣어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여낸 뜨끈한 미역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