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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담백 06화

소:담백 #봄05 김밥

소소하고 담백한 나의 다섯 번째 독백

by 버들

Chapter 5. 인생 김밥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 누군가의 소풍날이 되면 아침부터 주방이 분주했다. 아니, 소풍 전날 저녁부터 분주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엄마의 퇴근시간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아끌어 집 앞 작은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평소 좋아하던 과자와 음료수를 집어 들었고, 엄마는 김밥 재료들을 신중히 골라 담았다. 소풍을 가는 건 한 명이지만 김밥을 먹을 식구는 여럿이므로, 게맛살과 햄은 양이 많고 큼직한 것으로 골랐다.


소풍 당일 엄마의 기상시간은 평소보다 빨랐다. 김밥은 재료 손질부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평소대로 일어났다간 출근준비 시간이 빠듯해질게 뻔했다. 동이 트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조금은 이른 소풍 준비가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깨소금과 참기름을 두어 바퀴 둘러 고루 섞어준다. 김밥용 김 위에 양념한 쌀밥과 계란지단, 햄, 채썬당근, 시금치, 오이와 단무지를 차례대로 올린다. 재료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양 손끝에 힘을 주어 한번에 말아 준다. 동그랗게 말아진 김밥을 한편에 치워둔 뒤 김발 위에 새로운 김을 올린다. 김밥의 재료들이 하나둘씩 바닥을 드러내면 소풍 김밥만들기는 끝이 난다.


잘 말아진 김밥 중에서도 가장 반들반들한 녀석을 집어 들어 도마 위에 올린다. 칼 아랫면과 김밥 윗면에 참기름을 슥슥 바른 뒤 김이 눌리지 않게 슬근슬근 썰어준다. 첫 꼬다리는 엄마의 옆자리를 지키던 아이의 몫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묻는다.


“맛이 어때?”

김밥을 오물거리던 아이는 말없이 엄지 손가락을 올린다. 두 번째 김밥부터는 단면이 잘 보이도록 도시락 통에 담아준다. 도시락 통이 빈틈없이 꽉 차면 화룡점정으로 깨를 솔솔솔 뿌려준다. 참기름의 고소한 냄새와 알록달록 외관까지, 한눈에 봐도 예쁜 김밥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엄마의 김밥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단연 인기 만점이었다. 하나만 바꿔 먹자며 여러 명이 달려들기도 했으니 이하 설명은 생략하겠다.


대학 시절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편의점 김밥’과 ‘컵라면‘이라고.

빠듯한 점심시간이었기에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매대 위에 다양한 맛의 김밥과 삼각김밥이 늘 오와 열을 맞춰 서있었다. 삼각김밥을 먹을지, 일반김밥을 먹을지 그리고 어떤 맛을 먹을지, 1+1 상품을 고를지, 단품을 고를지 매일매일이 고민의 나날이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참치마요 김밥을 집어 든다. 전날에는 전주비빔밥 맛의 삼각김밥을 먹었으니 이번엔 기다란 김밥이 좋을 듯했다.


“해당 이미지는 제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출된 것으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편의점 김밥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겉 포장지는 화려하지만 속내는 소박하달까. 연출된 이미지만 보면 엄마의 김밥처럼 속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김밥 같지만, 막상 껍질을 벗겨보면 흰쌀밥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한 줄을 다 먹어갈 쯤엔 목이 턱 메이는 느낌에 국물 라면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또 어느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험실에 박혀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야말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점심을 편의점 김밥만 먹었다. 저녁 늦게 실험을 마치고 점심에 남긴 차가운 김밥을 씹고 있자니 어린 날 소풍에서 먹던 김밥이 그리워졌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김밥은 떼려야 뗄 수 없다. 포장이 쉽기 때문에 밥을 먹으러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되며, 한입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에 하던 업무를 멈추지 않고 식사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땐 김밥은 나들이나 소풍을 갈 때 먹는 기분 좋은 음식이었는데, 이제는 간단히 끼니를 떼워야 할 때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김밥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소풍날의 추억과 설렘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널따란 잔디밭 위에 준비해 온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우리.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퍼진다. 호기심 많은 어떤 아이는 본인 몫의 도시락을 먹다 말고 주변 친구들의 도시락 통을 기웃댄다.


“나 너희 집 김밥 하나만 먹어본다?“

말하곤 젓가락을 분주히 움직인다.

“너도 우리 집 김밥 먹어봐도 돼!“

생색도 빼놓지 않는다.


친구의 김밥이 꽤 입맛에 맞았던지 ”ㅇㅇ네 김밥 진짜 맛있어! “라고 외쳤다.

그 한마디에 ㅇㅇ이 도시락에 아이들이 시선이 집중되고 이내 “나도 먹어볼래!”, “나도 하나만!” 이라며 ㅇㅇ의 김밥 위에서 여러 개의 나무젓가락이 이리저리 교차한다.


김밥 속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도 이리저리 퍼져나갔다. 따스한 바람, 몽글몽글 일렁이는 아지랑이. 김밥을 먹으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고개를 젖히며 깔깔대던,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봄날의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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