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수확한 채소들
텃밭에는 홍감자쌤까지 총 7명이 있었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텃밭 구경을 마치고는 한 자리씩 차지하고 쪼그려 앉았다. 홍감자쌤은 직접 상추를 따는 시범을 보이셨다.
“360도로 돌아가면서, 바깥부터 한 장씩 따세요. 밑둥을 끝까지 떼어내야지 조금 남기고 뜯으면 안 됩니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이 깻잎이나 상추를 딸 때는 뭉텅이로 따내던데 하나씩 해야하는 구나. 더 자랄 것을 염두해 잎을 4~5개 정도 남겨두는 게 포인트 구나. 나름의 생각을 하며 선생님의 요령을 열심히 관찰했다.
이제는 내가 실습해볼 시간.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잎에 가까이 댔다. 목장갑을 안 끼고 맨손으로 하니 축축한 흙의 감촉이 더 선명히 느껴졌다. 손에 흙물이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콘크리트 벽에서 나와 맑은 공기가 감도는 땅 위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괜히 힘을 세게 줬다가 부러지는 거 아니야?’ 왠지 갓난아기를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잎을 잡아 당기니 뚝! 하고 생각보다 쉽게 잎이 따진다. 그 와중에 실수로 잎을 두 개 짚진 않았는지, 상추 뭉텅이가 쑥 하고 빠지진 않았는지 계속 살폈다.
그렇게 상추 외에도 쑥갓, 로메인 등 열매 작물이 아닌 것들을 수확했다. 낱개로 한 장씩 떼어낸 것을 한 곳에 종류별로 모아두니 제법 많은 양이 쌓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들이 있다. 상추도 생명이니까 소중히 만져야 하는 거구나. 자랄 때도 세심하게 돌봐줘야 하는데 수확할 때마저 조심히 다뤄줘야 하는 거구나. 대충 이런 거였다. 한 식자재가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이 길고 험난하다는 게 느껴졌다.
고추, 피망, 딸기, 가지 등 열매 작물에는 거름 주는 작업을 했다. 쌀자루처럼 생긴 비료 포대는 겨울에 땅 얼음이 얼면 썰매대신 쓴다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실제로 처음 봤다.
거름을 줄 때는 방향을 정해 통일감 있게 줘야 한다. 지난주에는 뿌리 오른쪽에 거름을 줬다고 하니 이번 주는 뿌리 왼쪽을 파기로 했다. 먼저 3열 종대로 길게 늘어선 열매 작물들의 왼쪽 흙을 두더지처럼 팠다. 거기에 모종 삽의 3분의 1정도 되는 양의 비료를 퍼 담은 후 이미 파 둔 공간에 넣었다. 그 위에 파냈던 흙을 다시 덮었다.
그 다음엔 곁입을 땄다. 식물이 계속 자라니까 곁입은 수시로 정리해 줘야 한다. ‘분지’라고 하는 Y자 모양의 부분 아래에 있는 자잘한 줄기와 잎을 제거해주면 된다. 앞서 피피티로 설명을 들었을 땐 확실히 이해가 안됐는데 직접 뭐가 뭔지 보니 쏙쏙 이해가 됐다. 작업을 하다가 한 선생님이 실수로 덜 익은 토마토 열매를 따버렸다. 에구구.. 아까워라!
8자 묶기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줄기가 곧게 자라도록 지주대에 노끈으로 묶어주는 일이다. 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때문에 줄기와 끈 사이의 공간을 손가락 두 개 정도 둬야 한다. 마지막으로 분무기에 넣은 난황유를 잎 뒷면에 고루 뿌려줬다. 액체에 맞아야 벌레들이 죽기 때문에 꼼꼼히 작업을 해야 한다.
잎에 붙어있는 벌레를 몇 개 발견했는데, 익충이라고 배운 것들이었다. “선생님, 이거 그냥 둬도 되는 벌레들 맞죠?” “아싸! 내가 맞췄다” 뿌듯함에 소리치다가 문득 내가 벌레를 보고도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나도 이정도면 농부가 다된 걸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 마음이 든든했다. 손에 들려있는 큰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눈에 보이는 건 내가 직접 수확한 유기농 쌈 채소와 그에 앞서 심은 해바라기‧접시꽃‧상추 모종. 짙은 풀냄새가 확 올라왔다. 흐르는 물에 씻어 밥에 고추장이랑 싸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쫄깃쫄깃하면서도 달콤하겠지? 행복한 상상 속에 기나긴 귀갓길이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으로 아무런 걱정없이 자연과 마주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가 '초록'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내 배도 자연적인 거 좋아한다. 유독 조미료에만 비상벨을 울린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아무 문제 없는데 기름진 음식이나 매운 음식, 고기를 먹으면 꼭 난리가 난다. 체하거나 배탈 나거나 둘 중 하나다. 며칠 전 유명 체인점에서 차돌박이를 사 먹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디단 유혹’에 빠지는 걸 주의해야한다고 했던가. 양념장에 찍어 먹는 고기의 맛은 아이스크림만큼 달콤했다. 입안에 넣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그러나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화장실 신호가 왔다. 배에서 부글부글 소리가 났고 복부 쪽 피부가 아렸다. 몸에 힘이 쭉 빠져 하루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었다. 배탈을 앓고 나니 한동안 식욕이 사그라들었다. 괜히 음식 잘못 먹었다가 약한 내 장을 또다시 들끓게 할 순 없지 않나.
일을 하다 보니 MSG 범벅 음식을 자주 먹게 된다. 외부 미팅을 할 때면 파스타, 나쵸 등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종종 한다. 이 외에도 매일 밤마다 빵, 튀김, 떡볶이, 짜장면, 라면, 칼국수 등 밀가루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곤 한다. 이런 식사를 하고 나면 맛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평소 자주 들르는 채소가게로 향한다. 상추·가지·애호박·아삭이 고추 등이 상자에 투박하게 담겨있는 걸 보면 그제서야 식욕이 돋는다. 내가 찾던 맛은 다름 아닌 ‘초록’에 있었구나!
언젠가는 퇴근길에 애호박 2개와 가지 4개를 2000원에 사서 집에 오자마자 부엌으로 갔다.
애호박과 가지를 물에 깨끗이 씻어 잠시 두고 계란을 풀어 플라스틱 용기에 잠시 뒀다. 애호박은 보름달 모양으로, 가지는 반달 모양으로 썰었다. 속까지 잘 익을 수 있도록 두께가 너무 두꺼우면 안 된다. 이들을 밀가루에 묻힌 후 탈탈 털어 계란물에 입힌 후 달궈진 팬에 올렸다. 차악~! 차돌박이를 구웠을 때 나던 소리가 났다. 이거지~비오는 소리를 듣듯 잠시 자연이 주는 ASMR을 감상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가지 한 조각을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뜨거운 김이 입안에 가득 찼다. 조심스럽게 씹으니 가지의 알싸한 즙이 터져나온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았는데도 계란과 밀가루가 섞인 맛이 고소함을 전해준다. 그야말로 자연이 준 ‘선물’에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