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시리즈 2] 스무고개 빌런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 자들.
화가 나면 마음을 다스려 내보내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되지 못하여 빌런을 만나서 화가난다. 그리고 키보드를 꺼내서 글을 쓴다. 오늘의 빌런은 지난번 [의식적 진상 - 악마의 자식]에 이어 [스무고개 빌런-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 자들.] 이다.
[스무고개빌런 -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 자들]
"담배!"
"네?"
"담배 달라꼬."
"담배 어떤거 말씀하세요?"
"1미리"
"1미리가 많아서요 어떤 1미리 말씀하세요?"
"에쎄"
"에쎄 체인지 1미리 맞으세요?"
"그거 말고 말고. 꺼먼거."
"(에쎄 스페셜 골드 1미리 - 얘는 분명 은색이다 를 꺼내며) 이거 맞으세요?"
"그래그래 그거. 알바 바뀟나 왜이래 담배를 못찾노."
"죄송합니다."
"(돈 혹은 카드를 던진다)"
"안녕히가세요."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에세1스페셜골드 은색 빌런이다. "통칭 은색빌런". 이 대화는 축약한 것이기 때문에 스무고개를 넘기는 경우도 있다. 같은 담배라도 피면 적응이라도 하겠지만, 이 빌런은 담배도 한 종류만 피지 않는다.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서 담배를 바꾸기 때문에 얼굴이랑 담배를 매칭해서 대처할 수도 없다. 저주에 걸린 사람처럼 스무고개를 하며 빌런이 원하는 담배를 얼른 찾기를 기도한다.
"은색빌런" 뿐아니라, 보헴슬림핏브라운1미리 빌런 등 다양하다. 위에 있는 빌런은 조금 나은 편이다. 스무고개를 거절하는 빌런도 있다.
"담배!"
여기까지는 모든 빌런들이 동일하다.
"독한거!"
매우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 더 힘들어진다. 누구는 8미리 짜리 말보르 레드도 순하다고 피고, 누구는 1미리 짜리 에세체인지도 독하다고 바꾼다. 그런데 '독한 거!'라니 황당하다. 이 빌런은 이 이후에 말을 하지 않는다. 이제 앞에 서있는 편의점 노동자의 숙련도와 경험에 달렸다.
담배재고 조사하며 봤던 모든 담배의 타르양을 떠올린다. 주위에 담배피는 친구들한테 들었던 '독한 담배'를 머릿 속에 그린다. 앞에 있는 사람의 취향을 고민해본다. '중년 한국 남성'이니 미국담배는 필 확률이 낮다. 그렇다면 말보르는 아니다. 던힐로 가본다. 던힐 6미리를 제시해본다.
"이거말고"
실패다. 이제 뫼비우스 스카이스블루를 제시해본다.
"이거 말고 독한거 있다이가"
아 망했다. 이거 말고 '독한 담배' 무엇이 있을까.
8미리짜리 뫼비우스 오리지널을 내밀어본다.
"그래 그래 이거"
성공이다. 담배하나 파는데 5분이 넘게걸렸다.
"수고해라~"
나를 조롱하며 유유히 빌런은 사라진다.
주3일 일하면 이런 사람들 5명쯤은 만난다. 자주 오는 사람들이야 대처라고 하지만 가끔오는 사람들은 답이 없다. 이 담배가 저 분의 수명을 하루라도 줄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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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런들은 무질서하고, 모두가 하나 같이 제멋대로다. 하지만 이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 이들은 99%의 확률로 남성이다. 80%확률로 중년이다. 흔히 말하는 '아저씨'들이 빌런이다.
내 분노 게이지의 8할을 담당하는 이들이다보니, 발생원인이나 법칙을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현재까지 한 고민의 결과가 알아낸 바가 있다. 이들은 '감정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빌런이 빌런인 이유는 하나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하기를 하지 않는다. 빌런들의 머릿속을 뒤져보지는 않았지만, 하고있는 생각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얼른 담배사서 가야지.' '아 덥네' '담배 어디가서 피지' ' 등이다.
언뜻보면 개인마다 다르고 무질서해보이는 생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지금 앞에 있는 노동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나는 물리적으로 빌런의 앞에 있지만 사회적관계 속에서는 없다. 내 옆에 있는 무인계산대와 나는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인계산대 힘들까봐 물건을 천천히 올리지 않는다. 이처럼 빌런도 나를 고려하지 않는다. 고려하지 않으니 오로지 자신이 편한 언어습관을 고집한다. '말보르 골드 한 값 주세요'하면 서로 행복할 문제를 '말보르 쎈 거'로 말해서 서로를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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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모든 사람을 막 대한다. 특히, 자신보다 약해보이거나, 자신이 권리를 행사하는 공간이라고 직감하면 증상은 심해진다. 자신은 이 공간에서 상대감정에 대한 배려나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노동을 상대에게 전가한다.
쉽게 말하면,'내가 말했으니 니가 잘 알아먹어라'는 식이다. 빌런들은 내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거나 통화 중이다. 아무 일하지 않아도 내 존재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들의 삶을 그려본다. 회사에서는 부장, 과장으로서 부하직원들에게 친절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은 업무명령을 내린다. 점심식사든, 회식이든 사람이 모이면 자기 이야기만 내뱉는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녀에게 훈계하고, 아내에게 명령한다.
특히, 이런 자들이 아내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다. 담배도 피지 않는 사람에게 "담배 사온나"는 명령을 한다. 아내분은 남편이 주문한 담배를 찾기 위해서 나랑 같이 고군분투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감정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만 살아온 인간.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고민해본 적없는 인간. 이것이 스무고개 빌런. 그리고 수 없이 마주하게 될 빌런들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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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바뀌지 않는다.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집에서는 강한 권력을 가진 가부장이다. 그들이 생물학적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들의 태도를 바꿀만한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피해를 입는 우리는 빌런들이 사가는 담배가 이들의 생명을 줄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스무고개 빌런의 예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도 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배려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다.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상대방을 고려해서 말하기.'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기.' 빌런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이런 일들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면, 빌런이 넘쳐나는 세상을 넘어서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의 건설에 도움이 되지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