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면 멀고, 마을버스 타면 너무 일찍 도착하는 애매한 거리.해태와 롯데 공장의 중간쯤에 있다.
고민하다가, 보통은 걸어 다닌다. 버스비 아껴서 매점 빵이나 사 먹는 편이 낫다.
개인적으로는 롯데보단 해태를 좋아한다. 왜냐. 가끔 공장에서 과자를 주기 때문이다.빼빼로를 많이 주는 데, 운이 좋으면 마가레트도 준다. 그래서 야구팀도해태 타이거즈를 좋아한다.
우리 동네 중학교는 두 개가 있다.양화 중학교와 양평 중학교.내가 나온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둘 중 하나로 입학한다. 내심 시설이 조금 더 나은 양평 중학교를바랐다. 그리고 바람대로, 양평 중학교에 배정받았다.
"어디 중학교야? 나는 양평 중학교인데."
석관이의 말에 나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고로 종아리 100대 맞고 쭈그러든 양성현은 양화 중학교. 친한 친구와 같은 학교 배정도 좋았지만, 싫은 놈 안 보게 된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꼬잉꼬잉......아니 혜정이는 같은 양평 중학교인데, 어차피 건물이 달라서 보기 힘들었다.
명목상 남녀 공학이지만, 남녀는 다른 반이고 동선도 겹치지 않았다. 가끔,
"야! 니들 왜 여기서 깡통 축구하는 데!"
"아. 뭐래. 여기가 바닥이 맨들 맨들 하니까 그렇지."
"통행에 방해되잖아!"
"이번만 할게!"
"거짓말! 저번에도 그랬잖아."
"...... 걸렸네."
여학생 교실 앞 바닥이 맨질해서 깡통 축구할 때본다. 매점에서 오란씨나 포카리를 사다가 발로 밟으면 납작해지는 데, 그게 깡통 축구공이다. 비 오는 날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실내 스포츠.
"야. 야. 지는 사람이 보이네나 따베 쏘는 거다!
친구, 하승철이 소리친다. 엉덩이가 커서 오리 궁둥이라는 별명이 있는 데, 앞에서는 너무 정색해서 안 부른다.
"난 보이네 먹을 건데."
매점 인기 빵은 두 개. 따베와 보이네. 따베는 페스츄리에 흰 설탕이 묻은 빵이고, 보이네는 팥 빵이다. 다만, 보이네 가운데에는 달콤한 생크림이 박혀있다.
-툭. 툭-
오리 궁둥이는 내 말을 듣지 않고 깡통을 찼고, 그대로 골인.
"좀. 비겁한데."
나는 입가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부에 그런 게 어딨음?"
"종 치겠다. 빵은 다음 시간에 먹자."
"좋아."
우리는 깡통을 들고, 교실로 달렸다. 잠깐 뒤돌아서, 혜정이한테 손 흔들고.
저 기집에 선생님께 이르니까 잘 보여야 한다.
그렇게, 중학교 생활도 어느새 3년째. 이제는 다시, 고등학교를 걱정할 시기이다.
아. 이제 더 이상 국민학교는 없다.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기에. 일제 잔재 청산이라나.아빠 따라서 놀러 간, 3분 어묵이 정말 맛있었던 국립중앙박물관도 철거되었다.
키도 좀 컸다. 이제는 키순으로 번호를 하지 않아 출석번호는 의미가 없다.그래도 김 씨라서 3번이다.
석관이와는 1학년, 2학년 때는 다른 반이었는데, 3학년 되면서 같은 반이 되었다.근데, 최근에는 우울해 보인다. 깡통 축구도 같이 안 하고. 그래도 가끔 노래방은 같이 갔다.
"난 노래만 부르면 스트레스가 풀려."
노래를 잘 불렀다. 특히 S.E.S 노래 아임 유어 걸을 모창(?)하면서 상당히 그럴듯하게 부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석했다.이유를 모른다. 걔는 삐삐도 없는데. 물론 나도 없지만.우리 중에는 승철이만 있다. 손바닥만 한 기기인데, 액정에 번호가 찍히면 근처 공중전화에서, 그 번호로 전화 걸면 되는 최첨단 기기이다.
"석관이 아버지 돌아가셨으니 가 볼 사람은 가봐라. 선생님은 오늘 저녁에 갈 생각이다."
종례 시간에 이유를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보니, 국민학교 때부터 친했는데, 이상하게 나는 걔네 집에 가 본 적이 없다. 핑계를 대며 거부했으니.부모님 얼굴도 못 뵈었다. 예전에, 엄마가 해외로 돈 벌러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있다.
"갈 거지?"
승철이가 묻는다. 나는 말없이 끄덕거렸다.당연히 가야지.
"저녁 7시에 보자. 밥 먹고."
"그래."
장례식에 가 본 적이 없어, 집에 가서 엄마한테 물어봤다. 절은 고인에게 헌화 또는 분향하고, 2번. 그리고 상주에게 1번 하면 된단다. 옷은 검은색. 절대 웃지 말고. 가족상은 진짜 슬프니까.
하긴,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상상하기도 싫다. 근데, 검은 옷이 딱히 없다. 정장은 물론 없고. 하여, 약간 통 넓은 검은색 바지에, 물 빠진 검정 티를 입었다.힙합과 단정함 사이, 어디쯤 있는 느낌. 뭐 괜찮겠지.
그렇게 차려입고, 나가려는 데,
"이거 가져가."
엄마가 한자가 적힌 흰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었다.
"들어가면 흰 함이 있을 거야. 거기다 넣어."
나는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례식장하고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승철이를 만났다.
"너 복장이......"
승철이도 물 빠진 검은색 옷으로 어찌 맞춰서 나왔다. 피식. 살짝 웃었는데,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 웃으면 안 되잖아."
내 마음을 읽었는지, 승철이가 정색한다. 자기도 웃었으면서.
"그러게......"
"우리 엄마가 절대 이빨 보이지 말랬어."
승철이가 다시 힘주어 말한다.
"그래......"
장례식장에 가니, 석관이가 웃으며(?) 맞이한다. 진짜로 웃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웃어?잘 못 봤나? 우리는 어쨌든 돈을 넣고, 하얀 국화를 들어 사진 앞에 놓고, 절을 했다.
사진 속 석관이 아버지는,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인상이 무섭게 생기셨다. 사진마저 분위기가 있었다. 가끔 석관이가 정색하면 나오는 얼굴하고도 닮은 듯하다.
한 번, 두 번, 절하고, 석관이와 맞절. 잘 못 본 게 아니다. 저놈, 웃고 있다.
향냄새에 취했나.아니, 너무 슬프면 웃음이 나온다는 데, 그래서 그런 건가.
"와 줘서 고마워. 정말."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아냐......당연한 거지."
"밥 안 먹었지? 육개장 줄게. 맛있어."
밥 먹고 왔는데 거부할 수 없었다.
"야! 오빠 친구들이야 인사하고, 네가 저기 좀 있어."
여동생이 와서 인사한다. 친하지는 않아서 고개만 까닥거렸다.
"근데.....생각보다."
"생각보다 안 슬퍼 보이냐? 이거 편육도 먹어. 맛있더라고."
"어...... 어......"
우리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우리 뒤로 웬 아저씨들이 못마땅한 듯 힐끔거리고, 석관이 할머니는 눈이 퉁퉁 부은 채,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석관이 친구들이구나. 와줘서 고맙다. 많이들 먹어라."
"예. 감사합니다."
다 먹었더니, 석관이가 여동생에게 말하고 우리를 바래다준다고 나왔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는데, 묻진 않았다.
"노래방 갈래?"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노래방 가자. 한 시간만."
"....."
승철이랑 나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못 들었나.
"노래방 가자. 내가 쏜다."
"그래도 돼?"
내가 조심스레 물었더니 석관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노래방을 간다고?
이게 가능한 소리인가. 이게 말로만 듣던 호로자식?
"부탁이야. 가자. 묻지 말고."
흰 바탕에 검은색 두 줄이 있는 완장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말했다.
"......"
그러고는,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노래방을 갔다.
그러면 진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든 석관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내가 쏠 테니 실컷 부르자."
가장 즐거워 보이는 것은 석관이었다. 뭔가? 가짜 즐거움 같기는 한데, 입을 열어 말하진 않았다. 석관이가 열정적으로 분위기를 띄운 덕분에 어느덧 우리 머릿속에 장례식이라는 것이 희미해졌다.
"이제. 속 이야기 좀 해도 돼?"
노래 시간이 끝나기 15분 전, 마이크를 잡은 석관이가 묻는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석관이는 마이크를 끄고 말했다.이게 본론이겠지.
"나는 진짜좋아. 저 인간 죽어서. 아빠 자격 없는 놈이야."
직감적으로 알았다. 감히, 감당키 어려운 말이 시작되리라는 걸.
"엄마는 저 인간한테 맞다가 스트레스받아서 췌장암 걸려서 돌아가시고, 저 인간도 같은 병으로 죽었네. 진짜 웃음밖에 안 나온다."
말과는 다르게, 석관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
"명욱아 내가 너 우리 집 한 번도 안 데려와서 섭섭했지. 우리 집 유광빌라 반지하야. 비 오면 물 새고, 아버지는 맨날 엄마 때리고. 그래도 나랑 여동생은 안 때리더라. 그럼 뭐 해. 진짜 싫어......"
"......"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히.
"이제 할머니랑 살고 있는데, 훨씬 좋아. 나는 추억이 단 하나도 없어. 저 인간하고 좋았던 추억이. 맨날 소주 먹고, 나랑 여동생 잠 못 자게 괴롭히고.엄마 때릴 때는 진짜......"
"......"
"우리한테 한다는 소리가, '니들은 돈 먹는 하마들이야. 빨리 돈 벌생각이나 해. 니들은 나한테 빚진 거야.' 맨날 그 소리했다. 웃기지 않냐. 내가 낳아 달라 그랬냐. 왜 나한테 지랄인데."
상상도 못 했다. 석관이의 아픔을.
"근데 나는, 잘 때리지는 않더라. 엄마만 때리고. 그게 더 싫어. 엄마는 왜 저딴 인간하고 결혼해서 고생만 하다가. 엄마......"
울음이 터졌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슬픔이 드디어 터진 듯 보였다. 왜 노래방에 오고 싶어 했는지 알겠다. 주변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석관이의 오열이 자연스레 묻혔다.
"흐흐흑......"
-띠리링-
15분이 지나도 우리가 안 나오자, 노래방 사장님이 30분 더 넣어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석관이는 좀 더 울고 싶어 했기에.
"내가 예전에 엄마 돈 벌러 가셨다 했지? 그거 거짓말이야. 진즉 돌아가셨어. 저 새끼한테 맞고, 병원비 없다고 고통을 생으로 참다가. 일만 하다가. 그러다가 암 걸리셔서. 아주 개 같아. 개 같아. 진짜......"
울음은 흐느낌으로 바뀌고 우리는 그렇게 석관이를 울게 내버려두었다.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노래방 보너스 시간이 5분 정도 남았을 때, 석관이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주 퉁퉁 부어 있었다.
"나는 큰아빠, 작은 아빠, 아빠네 식구들 다 싫어. 그래서 그 사람들 앞에서 웃었어. 아빠 돌아가셔서 기쁘다고 웃었어. 우리 엄마 맞을 때, 여자는 원래 때려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야. 거짓말 같지? 개 같아. 아주. 우리 밥 먹을 때 뒤에서 노려보던 사람들......"
석관이 말에 아까 우리를 빤히 보던 사람들이 떠 올랐다.
"아까 우리를 보던 아저씨들......"
"어 맞아. 내가 웃으니, 나보고 호로자식이래. 자기네들이 내 고통 경험해 봤으면 그렇게 말 못 할걸......이제 됐다. 좀 후련하네."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순간이지만 노래방 가자는 소리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자세한 속 사정도 모르고. 정말 미안했다.
"지금, 이 울음은......우리 엄마 불쌍해서 운 거야. 저 새끼 때문이 아니라. 맨날 밥은 안 먹고 소주만 먹었으니 오래 산 거지. 이 정도도. 할머니가 우리 안 돌봐줬으면 우리가 먼저 죽었을걸."
아까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퍼하시던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쨌든 내가 미안한 사람은 할머니밖에 없어.......데려다줄게."
우리는 말없이 나와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육개장 맛있더라."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석관이는 웃었다.퉁퉁 부은 얼굴로.
"편육도 맛있었어."
승철이도 거든다.
"다행이네. 학교서 보자."
"근데. 나 운 거 티 나냐? 얘들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저었다. 티 엄청났지만.
나는 승철이와 그렇게 집으로 왔다. 잘 다녀왔냐는 엄마말에 그렇지 뭐. 라며 대충 대답했다.
"아. 엄마. 고마워."
낯부끄러웠지만 말하고 싶었다. 왠지.
"...... 뭐? 잘 못 먹었냐?"
엄마의 정색. 순간 쪽팔렸다. 임기응변 작동.
"아니. 그냥 뭐 장례식 예절 잘 알려줘서 고맙다는 거지."
"아. 그거. 그래. 석관이는 괜찮냐?"
"응. 생각보다는."
"아휴. 어린 게 얼마나 힘들까. 너도 쉬어라."
노래방 다녀왔다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혼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속사정도 모른 채, 석관이가 호로자식으로 매도당할 수 있음이 싫었다.
그렇게 첫 장례식 경험이 마무리되었다. 머리가 복잡했다.보이는 사실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마음으로 알았다. 책에서 읽었다. 우리는 백조의 우아함만 보지만, 그 우아함을 위해, 물아래백조 다리는 미친 듯 움직인다고.
석관이는 백조였다. 항상 웃고, 밝은 모습 뒤에는 그런 처절한 물장구가 있었다.아빠가 엄마를 패고, 자식을 막 대하는 가정. 티브이에서는 봤는데, 주변에 있었다는 건, 또 다른 의미였다.
여러모로 생각했고, 성장했다. 석관이는 며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교했고, 깡통 축구도 하고 따베랑 보이네도 먹고, 가끔은 노래방도 갔다.
"야! 니들 여기서 깡통축구 하지 말랬지. 한 번만 더 하면 선생님께 이른다."
꼬잉꼬잉의 최종 통보. 승철이는 코웃음을 쳤지만, 나와 석관이는 하얗게 질렸다.
"아. 좀 봐줘."
"몰라. 알아서 해. 난 경고했다."
"너희들 꼬잉꼬잉한테 너무 쪼는 거 아냐?"
승철이의 개념 없는 발언에 나와 석관이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넌 진짜......아무것도 모르는 중생이로구나."
내 말에 석관이가 끄덕인다. 깡통 축구도 끝이군. 최근에는 석관이가 어이없는 것을 샀다. S.E.S 음반도 아닌, 뮤직비디오 CD.
"너네 집 컴퓨터 없잖아? 차라리 CD를 사지."
내 핀잔에 석관이가 웃으며 말한다.
"응. 겉표지만 봐도 좋아. 사진도 주거든."
"그게 따베가 몇 개냐."
승철이가 아쉬운 듯 말한다.
"넌 빵 좀 그만 먹어. 이 오리궁뎅아!"
"야. 이 썩었네야!"
둘은 투닥거렸고, 나는 웃었다.
"넌 뭘 웃냐. 이 염병알아!"
휴. 양성현 그 새끼. 나중에 패버려야지. 이러다가 평생 내 별명 염병알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우리들 중3은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