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테스토스테론의 펌핑

더 빨리 더 멀리 더 강하게/영종도

by 막시

남성과 여성은 각각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는다. 남성은 여성보다 평균 열 배 정도의 테스토스테론을 보유하고 있다. 이 영향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훨씬 공격적이다. 남성이 테스토스테론을 마음껏 발산하면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나 다행히 법과 제도가 있어 평화와 치안이 유지된다. 법과 제도는 일정한 규칙을 전제로 스포츠에 대해 남성성을 허용하고 때로는 조장한다. 스포츠의 한 종류인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면서 남자다움을 입증하려고 하고 인정받고자 한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마라톤을 경험한 러너들은 ‘더 빨리 또는 더 멀리 또는 더 강하게’라는 선택지 앞에 선다. 많은 러너가 서브3나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하고 일부는 철인 3종에 입문한다.

나에게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할 용기는 없었다. 철인 3종은 현실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달리자니 그놈의 테스토스테론이 허락지 않았다.

어느 날 리복이 주최하는 ‘스파르탄 레이스’를 알게 됐다. 이름만으로도 어떤 대회인지 알 것 같았다. 아드레날린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장애물 달리기였다. 홈페이지에 있는 대회 영상을 보니 마치 스파르타인들이 전투 훈련을 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영상에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회요강을 보니 ‘키즈’ 부문이 정말 있었다.

후기를 보면서 스파르타인이 되는 판타지에 빠졌다. 싫든 좋든 현실에선 늘 아테네인으로 살아가지만, 스파르타인처럼 살고 싶은 본능이 꿈틀댔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아빠가 주말에 무엇인가 하기 위해선 아내의 양해를 받아야 한다. 대회 일까지 충분한 기간이 남았을 때 아내에게 물었다. “스파르탄 레이스라고 좀 특별한 달리기 대회가 있더라고. 여기 참가하려는데, 혹시 9월 23일 특별한 계획 있어?”

“잠깐만, 그날 안 되는데? 같은 부서 후배 결혼식이야.”

“어…?”

개인 정보를 입력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장난인 줄 알았으나 사실이었다. 스파르타인이 된다는 기대는 구멍 난 풍선이 됐다. 내가 스파르타인이라면 “남편이 뭘 한다는데 가긴 어딜 가!”라고 말했겠지만 나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아테네인이었다.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뭐….”


어떻게 하면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스파르탄 레이스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다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두 아이를 대회에 출전시키고 나는 코치가 되는 것이었다. 두 아이는 매일 태권도에 다니고 5km 대회도 몇 번 참석했다. 해보지 않은 장애물을 잘 넘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아이들이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앞섰다. 아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하며 좀 더 강해질 거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뿌듯해졌다. 직접 선수로 달리면 더 좋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그래도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다. “얘들아, 아빠랑 장애물 달리기 대회 나갈래?”

“얼마나 뛰는데?”

“1km”

“엥? 그냥 1km? 어디서?”

“맞아 그냥 1km. 인천에서”

“어 알았어.”

딸은 그런가 보다 하며 그것으로 끝이었는데 아들은 어떤 장애물을 넘는지 집에서 대회장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혹시나 안 간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금요일 휴가를 내고 1박 2일 여행을 하기로 했다. 대회 날짜가 다가오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달리기 대회 가는 날 내 일정이 바뀌었어. 서영이 친구 엄마들과 함께 모녀 여행을 가기로 했어. 서영이도 좋데.”

“잘됐네.”

나도 손해 보는 건 없었다. 아들과 둘만의 여행을 할 수 있으니 홀가분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겠다 싶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아내가 결혼식에 가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 순간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아내에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나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아테네인이다.

1년 중 가장 좋은 날이 밝았다. 여행을 가서 좋은 날이 아니라 뭘 하던 좋은 9월 말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그건 워낙 책을 읽지 않으니 이때라도 읽으라는 구호일 뿐이다. 가을은 무엇을 해도 좋은 계절이다. 심지어 일하기에도 가을만 한 계절이 없다.

날씨 하나만으로도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좋은 날이었다. 출발 전 차 안에서 아들과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내고 첫 번째 목적지인 BMW 드라이빙 센터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 시간에 여행을 떠나는 자동차 안에 있으니 더 좋았다. 어린이집 대신 여행을 떠나는 아들도 연신 종알거렸다.

남자는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자동차를 좋아한다. 장난감 자동차를 좋아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 진짜 자동차를 사며 흐뭇해한다. 입사를 하고 3년째 되던 어느 날 집부터 먼저 사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을 애써 모른 척하고 첫차를 샀다.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뿌듯함에 들떴다.

아들은 자동차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드는 물건(?)이다. 자동차보다 큰 기쁨을 선사하긴 하지만 매월 지출하는 유지 보수비는 자동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다행히 자동차 유지 보수비는 돈이 나갈 때마다 속이 쓰리지만, 아이의 유지 보수비는 단순 수리가 아닌 업그레이드라 기분이 좋다.


BMW 드라이빙센터 쇼룸에 들어서자 매니저가 신분증을 확인하고 방문 카드를 만들어주었다. 방문 카드 한쪽에는 BMW 자동차가 반대쪽에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름이 적힌 카드를 본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SUV 오프로드 체험장으로 갔다. 준비된 차는 언젠가 한 번은 소유하고 싶은 차였다. 드라이버는 45도 인사로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안전벨트를 매자 드라이버는 천천히 출발했다. 모래밭과 물웅덩이를 통과하고 가파른 기울기에선 전복될 것 같은 위기도 맞았다. 그럴 때마다 자동차는 능숙한 성능으로 탈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동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체험이 끝나고 차에 내리던 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빠, 우리 차랑 똑같은데 왜 돈 내고 이걸 탔어?"

아빠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오토바이를 향해 달렸다.

아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금 탄 자동차와 우리 차는 같은 SUV에 색깔조차 같은 검은색이었다.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에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웃음이 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울림이 있었다. 이제 고작 일곱 살인 아이가 마흔이 되어서도 외형에 신경 쓰는 아빠를 가르쳤다.

인천공항에 갔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과 비행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터미널>이 공항을 배경으로 제작됐다. 빅터(톰 행크스)는 유럽에 있는 작은 나라의 국민이다. 미국으로 오는 동안 자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는 일시적으로 '유령 국가'의 국민이 된다. 미국으로 입국하지도 자국으로 출국하지도 못하는 그는 공항에서 살기 시작한다. 공항 관리국 직원들에게는 눈엣가시지만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미녀 승무원(캐서린 제타 존스)과 로맨스까지 키운다.

현실에서 그런 꿈같은 일이 일어날 리는 없지만,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공항에서 사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 생각이 들자 내가 보고 있는 누군가도 집이 아닌 이곳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8 평창올림픽을 몇 달 남겨놓지 않은 때였다. 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과 반다비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아들보다 큰 수호랑과 반다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냈다. "여보, 비타민이야. 받아!"

그곳에서 수호랑과 반다비를 만나기 전에는 마스코트의 유래와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호랑이와 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수호랑과 반다비는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와 곰돌이를 계승하고 있었다. 수호랑과 반다비는 업그레이드된 호돌이와 곰돌이의 2세였던 셈이다.

서울 올림픽 때 나는 아들만 했다. 그 아이가 30년이 흐른 후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의 아빠가 된 것이다. 수호랑과 반다비처럼 아들도 업그레이드된 2세였다.

공항에서 점심을 먹고 레일바이크로 향했다.


차에서 내린 순간 누군가 파란 도화지에 하얀색 물감을 군데군데 뿌려놓은 것 같은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다정한 햇살에 바람막이를 벗고 선글라스를 꼈다.

우리가 탄 레일바이크는 왼쪽 바다와 오른쪽 소나무를 끼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왕복 5.6km라 달리기 코스로도 적당해 보였다. 평일이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드물었고, 덕분에 바이크 속도를 마음대로 낼 수 있었다. 천천히 달리다 아들의 "아빠, 세게!"라는 말에 있는 힘껏 페달을 굴렸다. 아들의 신난 표정에 흐뭇했지만 더 힘을 낼 수 없을 즈음에는 속도를 늦췄다. 이마에선 땀이 송송 솟아났지만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힘을 주었다. 레일바이크를 타는 동안 아들은 기수였고 나는 말이었다. 아들의 신난 표정과 목소리에 힘이 절로 났다.

살면서 제일 잘한 게 아빠가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업그레이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아이들은 진정한 삶의 비타민이다. 생각에 잠긴 사이 레일바이크의 속도가 줄었고 아들은 다시 "아빠 달려!"를 외쳤다. 아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무엇일까? <위대한 유산>은 어떨까?


서해는 일몰이 아름답다. 영종도 좌측 끝에 있는 마시안 해변으로 갔다. 아들은 차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한 번씩 아들을 바라보았다.

영종도는 작은 섬이라 반대쪽 끝까지 가는 데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아들은 여전히 자고 있어 혼자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무의도를 바라보며 마시는 시원한 커피에 갈증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30분쯤 지났을 때 아들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아들과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거닐었다. 우리를 비추던 밝은 해는 지기 시작했다. 아들을 번쩍 안아 들고 아름다운 일몰과 바다로 잠수하는 해를 바라보았다. 먼 훗날 아들이 오늘을 기억할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아들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붉은 태양은 완전히 사라지고 노을만 빛났다.


대회장 공터에는 일찌감치 많은 선수가 모여 있었다. 선수 등록을 하고 기념품을 받았다. 스파르탄 얼굴과 글자가 새겨진 티셔츠를 아들에게 입히고 대회장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스파르탄의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드니 영락없는 스파르탄이다. 아들은 전사였고 나는 전사의 스승이었다. 창과 방패를 들고 다니며 전사의 모습을 보이던 아들은 푸드트럭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보고는 돌연 갓난아이가 됐다. 창과 방패를 팽개치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대회 출발 시각이 다가오는데 아들은 느긋하기만 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서야 출발선으로 가자고 했다. 정작 아이는 태연했는데 나는 아들이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출발선에는 어린아이들로 북적였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먼저 출발하려는 아이들로 뒤엉켰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 아들도 뛰쳐나갔다. 첫 번째 장애물부터 난관이었다. 키만큼 큰 장애물을 만나 어쩔 줄을 몰라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친 끝에 겨우 넘어 다음 장애물로 향하며 나를 바라봤다 “아빠 나무에 찔렸어."

피 나는 손을 펼쳐 보이고는 다시 힘차게 뛰어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함께 온 모든 부모는 아이를 향해 힘찬 응원을 보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장애물을 통과했다. 아이들이 장애물을 넘지 못할 때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응원하고 힘차게 넘어갈 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은 보자기에 들어간 채로 달리고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모래주머니를 나르고 철조망을 통과했다. 외줄 오르기와 그물망 오르기를 했다.

달릴 땐 누구보다 빨랐다가 장애물만 만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웠다. 어디선가 해봤다는 듯 능숙하게 장애물을 넘는 다른 아이들은 놀라웠다. 나는 어느새 아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아들은 장애물을 하나씩 넘어가고 있는데 나는 '비교'라는 장애물에 갇히고 말았다. 서둘러 잡념을 떨치고 아들을 응원했다. 아들은 속도를 높이며 결승선을 통과했고 나도 응원 레이스를 마쳤다. 외국인 대회 진행자는 "굿 보이"를 연발하며 아들의 목에 투구가 새겨진 큼지막한 메달을 걸었다. 옷은 물론 온몸에 흙투성이가 된 아들은 쑥스럽고도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전보다 더 강해진 아들을 번쩍 들어 힘껏 안아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끌어 모았다. 잠시 뒤 다친 손이 생각났다. “손은 좀 괜찮아? "

그제야 아픈 표정을 짓는 아들을 데리고 의료 부스에 갔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들은 스파르탄 레이스의 느낌을 속사포로 발사했다. 성취감과 뿌듯함이 넘쳐나는 아들이 한마디 할 때마다 칭찬으로 화답했다. 어른이 봐도 해내기 쉽지 않은 장애물을 모두 해냈으니 충분히 뿌듯할 만했다.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떠들던 아들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특별한 레이스를 해낸 아들이 오늘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전과 승부를 이어가길 바랐다. 달리기는 아들에게 남기는 위대한 유산이 될 것이다. 아이들이 달리기를 가까이하면 좋겠다.

아들과 여행을 다녀온 후 시간이 지나며 스파르탄 레이스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살짝 치켜들었다. 좀 더 강한 달리기는 결국 숙제로 남았다.

훗날 피렌체에서 만난 다비드 덕분에 새로운 도전을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더 멀리 그리고 더 강한 달리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좀 더 적당하면서도 강한 달리기만 찾았다. 더 강해지라는 테스토스테론과 조금은 주저하는 나의 기싸움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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