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아들 세바스티안이 기숙학교에 다니면서 루이스 부부는 삼 층짜리 목조 건물을 관리하기 버거웠을 겁니다. 집이 거대한 만큼 적적함이 공간을 가득 채웠죠. 루이스는 일손을 빌리기 위해, 그리고 말동무를 찾기 위해 호스트가 됐습니다. 외국인 여행자를 집 안에 들이면 간접적으로나마 세계여행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곳에서 저의 첫 임무는 빗자루질이나 물걸레질 따위의 단순 청소였습니다. 워낙 오래된 주택이다 보니 낡은 창문과 나무 기둥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수북했죠.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날이면 루이스는 나더러 안드레아스나 발나바스를 도와달라고 부탁했고요.
세바스티안의 방에서 XBOX 게임을 하고 있네요. 발나바스는 중간, 안드레아스는 제일 끝에 앉았습니다.
한편, 영국인 안드레아스는 요리를 담당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혹시, 김치 만들 줄 알아?”라며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로 그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죠. 아침은 간단히 우유와 시리얼로 해결해 상관없었지만, 점심과 저녁으로 항상 근사한 요리를 내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저를 위해 아시아식 국물 요리도 만들어 준 적 있었고요. 그는 제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편에 속했어요.
헝가리에서 온 발나바스는 바깥일을 맡았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벽난로에 넣을 땔감이 많이 필요했죠. 우리 여행자 셋이 지내는 방에만 하루 열 토막씩 장작을 썼으니, 다음 겨울을 생각해서라도 부지런히 장작을 패야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마사지에도 솜씨가 있어, 종종 이웃이나 루이스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출장 마사지를 갔습니다. 한 시간 정도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마사지를 해주면 십만 원 정도 번다나?! 물론 관광비자로 입국한 외국인이 현지에서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는 엄연한 불법입니다. 경찰에 발각이라도 되면 큰일 날 일이지만, 글쎄. 이런 외딴 시골에서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그 둘에 비해 저는 단순한 청소 업무를 맡았습니다. 어쨌든 군대에서 뻔질나게 했던 청소 아닙니까. 어색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죠. 하지만 창문 닦기는 세상에서 제일 싫더라고요. 청소는 열심히 하고 나서 뒤돌아보면 반짝반짝 깨끗해진 상태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노동입니다. 공들인 만큼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어떤 일보다 정직한 결실을 맛볼 수 있죠. 창문 닦기만 빼고요.
이 목주 주택에는 한국에서 흔히 보던 알루미늄 창틀이 없었어요. 흰색 창틀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고, 오랜 세월의 힘을 못 이겨 페인트가 바싹바싹 갈라졌습니다. 창문을 닦다 살짝 건들면 사르르……. 나무 부스러기가 방금 닦은 촉촉한 유리에 찰싹 달라붙었습니다. 꼭짓점을 닦으려면 어쩔 수 없이 건들 수밖에 없는데, 이 바보 같은 현상은 계속 반복되었죠.
울며 겨자 먹기로 작업실 창문을 모두 닦은 다음 날, 루이스가 말했습니다.
“윤. 이 창문 좀 봐봐. 얼룩이 그대론 걸?”
아뿔싸. 창문을 닦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물기가 마르고 난 자리에 희미한 얼룩이 남아버렸습니다. 투명한 창문은 내가 청소를 빨리 끝내려고 소홀히 한 만큼의 증거를 남겨 루이스에게 일러바쳤어요. 얄미웠지만 하는 수 없었죠. 온 정성을 다해 닦고 또 닦고. 이렇게 박박 닦아 버리면 유리가 점점 얇아져 나중에 산산이 조각날지도 모른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며 하루 평균 4~5시간 정도의 노동력을 제공했고, 주말을 비롯한 나머지 시간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셋 중 제가 가장 능력이 없네요. 긴 학교생활 동안 실생활에 써먹을 유용한 잔기술을 배우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진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공부도 썩 잘하지도 않지만.
발나바스와 함께 작업한 결과물. 마당에 작은 쉼터를 만들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제 또래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할 줄 아는 게 얼마나 많던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취미활동을 했고, 그 수많은 체험 속에서 생활의 지혜를 배웠나 봅니다. 특히, 학교 동아리 활동에서 이것저것 배웠다 하더라고요.
요즘 한국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만나보면, 교내 클럽활동도 모두 대학교 수시전형을 뚫기 위해 전략적으로 가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경영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마케팅 동아리에, 컴퓨터 공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컴퓨터 동아리에, 이런 식으로요. 물론, 관심 분야에 맞게 동아리를 선택하는 건 아주 좋죠. 요즘 친구들 정말 계획적이고 똑똑하잖아요.
하지만, 청소년들이 다양한 체험은 하고 있는지 걱정됩니다.그런 수많은 경험 후에 어느 정도 청사진이 그려지면 거기에 맞춰 동아리를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동아리에 가입했는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원해서 가입했는지 개인적으로 정말 궁금합니다.
동아리만큼은 삶을 조금 더 재미있고 행복하게 보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가입하면 좋겠네요. 제가 외국에서, 루이스네 집에서 만났던 외국인 친구들처럼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면 내가 운동할 시간에, 악기 배울 시간에, 여가 활동을 보낼 시간에,
자격증이나 다른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
또는 그런 공부를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피어오르곤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알죠. 시간 낭비로 보이는 사소한 일도 삶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즐길지 알려준다는 것을.
TIP
- 워크어웨이는 여행자와 호스트 서로 돈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법적으로 문제 될 건 없어요.
하지만, 입국할 때 절대로 'Workaway'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세요. 입국 심사관은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 여행자가 'Work'라는 말을 하는 순간 돌변한답니다. 그냥, 게스트하우스 잡아서 평범하게 여행한다고 대답해주세요.
- 할 수 있는 일거리가 많이 없을 것 같아, 혹은 제대로 일을 못할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스트도 여행자로부터 크게 기대하는 게 없어요. 일단, 마음에 드는 일거리를 찾았다면 충분히 어필해주세요. 내가 이 호스트에게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지 말고요. 한국인만큼 열심히 일하는 국민도 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