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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Aug 24. 2022

화양연화

(13화) 춘자 씨가 사는 그 집

과거의 그때, 나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나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은 가장 어두웠던 한 때를 지나고 나서 시작됐다. 대입 실패 후 원하는 대학교에 편입학할 때까지 나의 20대 초반은 암흑기 그 자체였다. 그 시절엔 대학이 전부인 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꼭 껴져야만 하는 단추 같았다. 단념하려고 해도 쉽사리 단념되지 않았고 포기하려고 해도 도저히 포기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큰 실패에 방황하는 사이 나의 자존감은 낮아질 때로 낮아져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의 정상궤도에서 이미 한참 벗어난 것처럼 느껴졌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눈을 뜨고 밤을 지낸 날도 여러 날이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결과적으론 늦은 나이였지만 결국 원하는 곳에 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20살 초반에 즐겼던 많은 것들을 놓쳐 버렸기에 이제라도 그 간극을 메우고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갈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선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 심사숙고해야 했다.


당시 과학기자가 꿈이었던 나는 학보사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보통 학보사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은 1~2학년 학생들로 어린 친구들이 많았고 기수제가 존재해 상하관계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런 건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회가 되는 한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학보사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추가로 6학점 정도 더 듣는 스케줄이라고 해야 할까. 유독 쪽지시험과 과제가 많았던 전공들이 많았기에 전공수업은 전공수업 대로 소화해야 했고 공강엔 틈틈이 취재를 다니고 기사를 써야 했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때까진 밤새 학보사 편집국에 출근해 원고를 수정하고 완성해야 했다. 3학기 동안 이 생활을 반복했다.


당시 나의 수면시간은 4시간이 전부였다. 매일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었다. 하루는 너무 지쳐서 딱 하루만 쉬고 싶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쉴 수 있는 날을 계산해봤지만 그다음 주 주말까지 쉴 수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어 좌절하기도 했었다. 매일이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었지만 그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나의 화양연화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꿈을 위해 원하는 경험을 하던 중이라 그랬을까. 몸은 힘들어도 그때만큼 눈빛이 반짝이던 때가 없던 것 같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던 시기라 노는 것도 참 열심히 했다. 나이에 얽매여 이제라도 찾아온 많은 기회들을 놓치긴 싫었다. 고학번 화석들은 가지 않는다는 학교 축제도, 체육대회에 가서 하는 응원도, 학교 앞 유명한 술집들도 한 번씩은 다 경험하고 싶었다. 감사하게도 주변에 인정 많은 동생들이 나이 많은 언니라고 불편해하지 않고 알뜰살뜰 챙겨준 덕분에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다 겪어볼 수 있었다. 늘 꿈꾸던 대학생활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시절. 출처: YE SOL


학보사 생활이 끝나고 나서는 졸업논문 준비와 남아있던 졸업 필수 학점들을 채우느라 또다시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취업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나는 대학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CC(캠퍼스 커플)가 됐다. 막 학기를 남겨두고 CC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우린 20 살대 초반의 CC들처럼 설레는 연애를 시작했다. 빗방울이 교정을 적시던 그 해 여름, 우린 학교 주변을 걷고 또 걸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싱그러운 여름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은 20살 때나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20대 후반에 찾아온 설렘이 낯설고 좋았다. 그렇게 나의 아름다운 시절은 절정을 맞았다.

풋풋했던 그때 우리. 출처: YE SOL


운이 좋게도, 이 시절을 함께했던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 아름다웠던 그때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며칠 전은 우리가 만난 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결혼한 후에도 아직 까진 연애 기념일을 소소하게 챙기고 있다. 이날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뜨거웠던 그 해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 시절 사진을 꺼내보면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가 있다. 그 시절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5년간 우리가 겪었던 슬프고 좋았던 일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간다. 아마 매년 8월 이맘때가 되어 그때를 회상하게 되면 매번 설레일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할머니의 젊은 날은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할머니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곱씹으며 행복에 잠긴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할 때 최대한 많이 행복한 기억을 축적해 놓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행복한 기억은 많았다. 할머니도 우리 어릴 때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할머니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 물어봤던 기억은 없다. 다만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의 눈빛이 가장 반짝였던 순간을 회상해 볼 뿐이다.


할머니는 당시 ‘포천 김지미’로 불릴 만큼 외모가 출중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는 18살 때 결혼하셨는데, 외할아버지가 14번째 맞선 상대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다툴 때면 항상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상대가 좋다는 걸 번번이 퇴짜를 놓고 고르고 고른 게 외할아버진데 완전히 잘못 골랐다”라고 말이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토라진 표정을 지으시곤 했다. 실제로 보았던 꽃다운 나이의 할머니 모습은 유명한 영화배우 같아 보였다. 진한 눈썹과 커다랗고 도도한 눈매, 오뚝한 코까지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우리가 사진을 보고 놀라면 할머니는 으쓱한 표정을 지으시곤 하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식 사진. 출처: YE SOL


할머니 말에 따르면, 빨래를 하러 냇가에 가면 지나가던 남자들이 그렇게 추파를 던지곤 했다고 한다. 가끔 냇가 주변으로 미군들이  차량이 지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양키들까지도 휘파람 소리를 내며 할머니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건  콜링이었겠지만 당시 이런 개념에 무지했던 할머니 생각엔 인기를 방증하는 척도쯤으로 여기셨던  같다. 가부장적인 사회였고 여성인권에 대해 무지하던 시대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있었겠구나 싶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장 아름다웠던 그때, 가장 인기가 많았던 그때가 정말 할머니의 화양연화였을까? 18살에 결혼하고 19살에 임신해 연이어 4남매를 낳으시며 가정을 돌봐야 했던 할머니에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얼마나 있었을까. 자신의 화양연화가 지나고 있음을 할머니도 자각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학구열이 높았던 할머니에게 나와 같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었더라면 할머니는 얼마나 더 멋진 인생을 살았을까. 할머니가 자주 내게 이야기했던 말이 있다. “너넨 정말 좋은 세상에서 태어난 거야”라고 말이다. 이 말은 할머니 뜻대로 살 수 없었던 전쟁과 가난이 있던 할머니의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과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기회가 많은 우리 세대에 대한 질투 섞인 말은 아니었을까.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가는 동안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할머니도 자신의 기억 속에 화양연화를 품고 사셨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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