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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영 Feb 21. 2022

소설을 연재합니다(10)

어느 집이나 사연 하나씩은 있지요.

“좋아지더라고요. 성적도 많이 오르고. 제가 좋아하니까 아이도 만족해 했고요... 근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중현 엄마는 말문이 막힌다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 그녀의 코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현주는 그녀가 울컥하는 감정을 견뎌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현주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그녀의 손 위에 얹었던 건, 그러니까 위로하려는 마음이었다. 동정과 연민이 이끄는 타인을 향한 자비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중현 엄마는 현주의 손에서 제 손을 슬며시 끌어냈다. 그건 현주의 진심은 알겠지만 자비심은 함부로 베풀 수 없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저는 아이 아빠가 아이를 자랑스러워 하도록 만들거예요. 지금은 힘들지만, 중현이는 극복할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왔고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선생님.”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하고 중현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주는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진심을 다해 힘내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중현 엄마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날아왔다.

[선생님. 이제야 연락드려요. 중현이는 학원도 안 다니고 친구들과 맘껏 놀기만 해요. 선생님 말씀이 옳았어요. 중현이가 행복해하니까 모든 게 좋아졌어요. 그동안 제 욕심에 아이를 너무 힘들게 했나 봐요. 선생님 덕분예요. 감사합니다.]

문자의 마지막에는 한번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쓰여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현 엄마에게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중현에겐 매우 잘 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현주는 음식물이 얹혀있듯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았고, 기분 좋게 중현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과외 선생의 위치는 그런 것이었다. 학생이며 학부모와 관계를 맺을 때 피하진 않지만 깊게 개입하지 않는, 딱 그 정도의 선을 유지하는 것. 게다가 현주는 살아남기 위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망각이란 걸 일찌감치 깨달은 터였다. 중현이에 관한 한 현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망각이었다. 그건 아마도 중현이 엄마가 무엇보다 원하는 일일 것이었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중현의 이야기를 뜬금없게도 윤재 엄마가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군요. 중현이가 아빠 병원에서 일하고 있군요.”

현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대듯 말했다. 벌써 6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지만, 중현과 중현 엄마의 모습은 길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듯 눈에 선했다.

“그렇대요.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요. 중현이가 워낙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니까요.”

윤재 엄마가 비웃음같은 냉소를 흘렸다. 그때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상희 엄마의 전화였다. 상희 엄마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까 아침에 얘기했잖아요. 학부모 모임이라니까... 아구, 뭐가 늦었다 그래요. 아직 네 시도 안됐는데... 아, 알았어요.”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상희 아빠라고 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화를 한다며 상희 엄마는 우는 듯 웃었다.

“금슬이 좋네요. 좋겠다아~”

윤재 엄마가 부럽다는 듯,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어머나 아녜요. 이 사람은 날 감시하느라고...”

상희 엄마는 아차 싶었던지 아무래도 먼저 집에 가야 할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나가자며 현주도 가방을 챙겼다. 그러나 윤재 엄마는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상희 엄마는 잠시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다음에 보자는 인사말을 하고는 재빨리 룸을 나가 버렸다. 예상치 못하게 윤재 엄마와 둘이 남아버린 현주는 순간 난처했다. 윤재 엄마와는 친한 사이도 아니거니와 방금 중현이 얘기를 나눴던 것도 찝찝했다. 어쩐지 자신이 피하고 싶은 일에 말려든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상희 엄마 말예요,”

윤재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편이 의처증이 있대요.”

“네? 아... 그래서 급하게 간 거군요.”

현주는 상희 엄마의 일그러질 듯 어쩌지 못해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나도 들은 얘기에요. 상희 엄마만 참석하면 다른 사람들도 불안하다고. 남편이 한두 시간마다 전화하고 심지어 모임 장소까지 찾아와서 기다린다는 거예요.”

“그렇군요. 안됐네요. 상희 엄마... 힘들겠어요.”

“어느 집이나 사연 하나씩은 있지요. 상희 엄마처럼 다소곳하고 세상의 풍파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사람한테도 말예요.”

윤재 엄마는 그렇게 말한 후 “이 집 커피가 참 맛있네요.”하며 말을 돌렸다. 창가에는 햇빛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곧 노을이 내려 앉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차도에는 온통 퇴근한 차량들로 뒤덮일 것이었다. 현주는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축낼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재 엄마는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제 정말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볼까, 내가 너무 채근하는 걸까, 혹시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는 걸까?’ 현주는 마음속으로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윤재 엄마를 곁눈질할 뿐이었다.


“희연 엄마.”

윤재 엄마가 뭔가 결심했다는 듯 현주를 부르더니 말했다.

“중현이를 가르쳐 봤다니까 하는 말인데요. 윤재 남동생이 지금 중2 학생인데... 혹시 과외 가능할까요?”

현주는 그제서야 윤재 엄마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친분 있는 사람의 자녀는 늘 신경이 쓰였고 그만큼 부담이 큰 일이어서, 현주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인 자녀의 수업은 거절하곤 했다. 그러나 윤재 엄마는 현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결심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실은 우리 둘째가 학습 장애가 있어요. 틱 증세도 좀 있구요. 아..., 중현이 정도로 심하진 않고요. 희연 엄마가 경험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부탁할게요.”

윤재 엄마의 얼굴이 문득 벌겋게 달아올랐다. 딴에는 큰 용기를 낸 것이란 듯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을 덧붙였다.

“희연 엄마는 잘 모르겠지만, 중현이 말예요. 자살 소동도 벌이고, 애 아빠가 중현이를 정신 병원에 감금시키고 그랬다고, 소문이 파다했어요. 정말인지 아닌지는 확인은 안 해봤지만요. 그게 다 중현이를 대학 보내려고 중현 엄마가 강요해서 그랬다고 말들이 많았어요. 저러다가 애 하나 죽이겠다고 중현이네를 얼마나 걱정하고 그랬는지 몰라요.”

“네? 중현이가요?”

현주는 너무 놀라서 귀가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윤재 엄마는 잠시 뜸을 들이려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도 지금... 사실 아이한테 공부를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애 아빠의 사회적 위치도 있고 해서요. 애 아빠가 회사 중역인데, 아무래도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중현이처럼 그렇게 만들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냥 냅 둘 수도 없구요. 이 방법 저 방법 쓰는 중인데... 희연 엄마가 중현이를 가르쳤단 얘길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쩐지 이게 운명인 것 같다고 말예요.”

현주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현 엄마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했었다. 그러나 윤재 엄마 말에 의하면, 중현이는 끔찍한 일을 겪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윤재 엄마는 대학 따위에 목을 매서는 중현이를 힘들게 했다며 그들 가족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비슷한 장애를 가진 제 아들의 과외를 부탁하다니, 결국은 제 아이에게 중현이와 똑같은 고통을 주겠다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현주는 윤재엄마의 고백이며 제안이 미적분의 공식보다 난해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아까부터 느껴졌던 요의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현주의 아랫배를 짓눌렀다. 현주는 윤재 엄마에게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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