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나는 중동 항공사 승무원을 시작으로 4년 간 48개 국을 비행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우연찮게 배정된 In-flight Catering 분야에서 기내식 기획 및 구매의 업무, 승무원 교육을 담당했다. 신기했다. 나름 항공사라 소위 '갑'의 권리로서 계약되어 있는 국내외 기내식 제조사를 간혹 방문을 할 수 있었는데기내식 공장, 기내식의 세계란 참으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출처. Emirates Airbus A380 interior @Sorbis/ Shutterstock.com
기내식에 발을 들인 김에 전문가가 되고 싶었고 전 세계 200 여 곳의 기내식 센터를 보유한 글로벌 기업의 한국지사 구매 파트장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목표로 정한 지 약 2년 만에 두 번에 걸친 지원이었다.내 인생의 전반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운이 따랐던 것 일까 시간이 걸릴 순 있어도 원하는 것에 불가능하진 않았던 것 같다. 신나게 회사를 다니며 외국 지사로의 출장도 기대해보며 다양한 항공사를 만나는 포지션에 노력을 열중하고 있던 그때, 전 세계가 뒤집어졌다!
코로나가 닥친 그 해 2월 중순, 회사에서 나는 2년째를 접어들고 있었고 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친구와 인도네시아 발리를 찾았고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난 뒤 단 며칠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코로나가 잠시 우리 곁을 지나쳐 갔던 이전 메르스나, 사스와 같은 질병이 아님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고 있던 때는 고작 2명에 불과했던 한국인 확진자가 돌아오고 나니 걷잡을 수 없는 확진자 수로 연일 뉴스에서는 경각심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항공업계는 짧은 시간에 크게 승객 수가 줄어져 갔고 초반에 에이 그러다 말겠지, 잡히겠지 너무나 호언장담 했던 동료들의 말들은 이제 몇 년 간 가망이 없겠구나, 힘이 안 난다, 이러다 회사가 망하는 건 아니겠지?라는 우려의 말로 바뀌어 갔다.
달을 거듭할수록 1분 1초가 숨 가쁘게 돌아가던 기내식 공장도 활력을 잃어갔고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조업 직원들도 눈에 띄게 줄고 항공사의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도 일부 불이 꺼져 있거나 비행기에 싣기 위한 도크(Dock) 앞 비좁을 정도로 즐비되어있던 기내식 카트, 오븐, 기내 용품들도 점점 줄어져 갔다. 하루 100편의 이상의 항공편을 준비하던 회사는 코로나 가 극심해진 이후 약 10편 남짓의 항공편을 준비하게 되었으니 직원들의 시름도 늘어만 갔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라!
코로나가 왔다고 해서 마냥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회사나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보다나 스스로 나의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회사에서 나는 중간 관리직이었기 때문에 희망퇴직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되었는데 곧 국가의 지원금도 끊겨 무급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 직전이 되어 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했다. 희망퇴직 위로금이 많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 않은 금액을 바탕으로 이러한 풍파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경쟁력을 쌓을 '내'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솔직하게는 희망부서 내부 채용에 실패하면서 항공사를 접객하는 자리가 멀리멀리 물 건너간 것 또한 하나의 이유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