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윤선 Apr 02. 2021

연인들이 사랑하는 공간

40대에 떠난 피렌체 허니문

How I met my husband

여자, 비너스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하얗고 통통한 비너스상인 왠지 있어 보이는 분위기의 꿈 많은 소녀를 향한 계획이 있었다. 그녀는 반달눈과 올라간 입꼬리로 늘 웃는상이라 모두 좋았더라고 했다. 

 무엇보다 에너지가 많다. 음악이 나오면 몸을 들썩이고, 흥이 많아 표현력이 풍부했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좋은 즉흥성 덕분에 강의 무대 체질이다. 방의 흰 벽에 연필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훌륭한 벽지가 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콘텐츠가 풍부하다. 

 이런 여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외국에 떠나 있던 시간만큼 한국에서 다시 처음부터 자리를 잡는 게 버거웠는지 최근 몇 년간이 길고 느슨하게 느껴졌다. 바빠야 잘 나가고 있다는 뜻으로 인식되는 이 사회에 어쩌면 적응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른다. 

한동안 두 발을 땅에 딛지 못했다. 일과 사랑에 균형을 잃고 흔들리면서도 우아하게 짝다리를 짚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이 라스베이거스 플라밍고 호텔에서 아침 뷔페를 먹으며 통유리로 바라본 플라밍고 같았다. 나뭇가지 같은 한쪽 다리로 서서 목을 분홍색 깃털 속에 묻고 자는 모습을 보니 귀여우면서 안쓰러웠다. 인형인 줄 알았다. 재밌는 건 태어날 때는 회색이었으나 게와 새우를 먹고 자라서 핑크색이 되었다니 웃겼다. 갑각류에 들어간 아스타신 색소를 먹으면 내 연애도 핑크빛이 될 수 있을까?      


남자, 르네상스맨의 이야기   

 

어디서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요즘은 싱글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여서 괜찮다고는 하지만 난 사실 고르느라 버티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소개팅이다. 

5월의 오후 해 질 무렵에는 그 남자의 삶의 무게가 들어있다. 

 장소는 선유도의 북카페다. 난 빨간 운동화에 새로 산 빨간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나갔다. 너무 교회 오빠 스타일인가? 나에게 상담하듯이 고민 이야기를 편하게 했다. 내가 정말 편한가 보다.  마치 그녀가 작고 동그란 입술로 사랑하자고 외치는 거 같았다. 

대화 중에 우리가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서로 한 번도 못 봤지? 이런 게 운명인가? 친구처럼 재밌고 여동생처럼 사랑스러웠다. 내 생활에도 기분 좋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소개팅 후에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그녀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노래에 몰입해서 따라 부르는 모습을 훔쳐봤다. 심장도 내 진실의 콧구멍도 함께 벌렁거렸다. 눈이 빨개지는 건 뭘까? 말로 표현 못 할 순수함을 보고 눈물이 날 뻔했다. 대신 화음을 잘 넣는다고 칭찬을 놓치지 않았다. 

내 비너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르네상스맨: 르네상스적 교양인(문학과 회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능하고 관심도 많은 사람) 네이버 영어사전 발췌     


시작하는 연인들


 남녀 간에는 약속을 잡고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느니 마느니, 밀당을 하지 않고도 우리는 매일매일 만났다.

어느 날, 그가 후시딘을 주면서 말없이 내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손가락을 숨기며 뜯는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 부끄러운 곳을 들켜 민망하고 황홀했다. 벌거벗은 피렌체의 다비드상을 보고도 전혀 민망하지 않았었다. 두오모 종탑에 올라가서 황홀한 피렌체 시내를 바라봐도 숨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앞에서 아홉 살짜리 어린 여자애가 되어 손가락을 내밀었다. 불안하면 손거르미를 참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피가 곧 나올 지경까지 손가락의 피부를 뜯어댔다.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열심을 낼수록 손가락을 더듬거리며 새 살을 못 참고 뜯었다. 피가 나야 끝나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사랑해 줄 거 같았다. 연고가 새 살을 돋게 동안 우리 사이도 재탄생되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 관계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 하나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씨뇨리나 광장에 서 있는  사비니 여인의 납치(1583년, 지오반니 볼로냐 작품)


신혼여행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갔다. 11월이 우기라서 허니문 내내 비를 맞으며 구름 진 하늘 아래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카푸치노를 마셨다. 노천카페는 테이블, 의자, 벽과 천장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한 장면이다. 시뇨리아 광장 한복판에 서면 조각상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벌거벗은 3명의 사람이 꽈배기처럼 꼬여서 뭘 하는 건지 물었다. 난 미술사 시간에 공부한 작품을 실제로 본 반가움에 저건 겁탈당하는 ‘사비니 여인의 납치’라고 했다. 조각가 잠볼로냐가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그림과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해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냐며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미술관이라 낮이건 밤이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의 조각상을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예술이라고 했다.

걸어서 우피치 미술관에 닿았다. 미술관 가이드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설명과 작품 해설이 한 편의 예술 영화다.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어보니 나는 ‘비너스의 탄생’, 그는 르네상스맨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를 꼽았다.

‘비너스의 탄생’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시에 근거하여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렸다.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 조개껍데기를 타고 바람에 실려 키프로스 해변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봄의 여신이 비너스를 위해 봄꽃들로 장식된 옷을 펼치며 맞이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섬세한 묘사에 우아하고 기품 있는 여성상을 만났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왼손과 머리카락으로 아래를 가리고 있는 자세 그대로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사랑의 비너스 광고 문구가 떠올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 수태고지‘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함을 알리러 집에 찾아간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발견했다. 그는 크고 판다처럼 처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정원에서 책장을 넘기는 성모의 오른손과 팔은 왼팔과 비례가 맞지 않느냐며 질문을 던졌다. 정면에서 자세히 보니 오른팔이 오징어처럼 길게 늘어져 보였다. 투시 원근법과 대기 원근법을 표현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다르게 제작했단다. 옆에서 봐야 비례가 맞는 그림이라는 거다. 이제야 두 팔 길이가 맞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우피치를 나왔다.


우피치미술관 수태고지 


 미술관 밖은 회색 유화 물감으로 하늘을 붓칠 한 듯 바람과 비가 흘러내렸다. 빗방울과 함께 벌꿀을 받아먹는 곰처럼 당 충전을 위해 주머니에서 따뜻해진 하리보 젤리를 먹었다. 다비드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Academia Gallery)으로 향했다.

석조 건물의 높은 천장에는 서늘함과 조용함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잠시 후 정면에 바글거리는 사람들 위로 거대한 다비드상이 보인다. 물 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을 상징한 인물이다. 5.17 미터의 대리석 조각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비드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과 큰 눈에 찡그린 눈썹, 목의 근육, 발과 발가락이 정말 컸다. 우리 시야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이라 더 그렇게 보였다. 몸의 젊음과 힘이 역동적으로 S자 몸매가 되어 근육이 꼬이고 부풀어 에너지를 뿜어대고 있었다. 

 비누 냄새가 날 것 같은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몸과 근육은 두껍고 탄탄했다. 이 명작을 오래 자세히 보기 위해 다비드상 뒤편에 엉덩이 주위로 둘러서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우리는 한참을 다른 관광객과 함께 뒤태를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며 감상했다.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에 무엇인가 달려 있는지 보이는 각도였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명암이 달라져 얼굴의 광대뼈를 중심으로 목 근육이 어떤 방향으로 회전되었는지 알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미술관 앞, 가죽 공방에 들어갔다. 큼직한 작업대 위에 은색과 녹슨 쇠 같은 다양한 도구, 형형색색의 가죽들이 널려 있었다. 라디오에서 낮게 흐르는 음악과 가죽 냄새에 취해 구경하느라 기념품을 사러 왔는지 잊을 뻔했다. 어린애같이 혀가 나온지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하는 장인의 옆얼굴. 저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양가죽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우리의 이름을 새긴 지갑을 사자고. 

땀이 돋은 장인의 이마를 보니 우리가 주문한 걸 조금이라도 더 잘 만들고 싶은 모습이다. 가죽을 얼굴에 갖다 대고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다. 내 손에 꼭 맞는 분홍색 가죽 장갑도 샀다. 욕심 없이 묵묵히 장인 정신을 고수하는 친절하고 다정한 아티스트 들이었다. 여행을 통해 화려한 문화로 넘쳐나는 볼거리와 예술적인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 

저녁이 되어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르노강을 따라 펼쳐진 피렌체의 야경은 내 생애 최고였다. 모든 감수성을 다 동원하여 언어와 문자로 콸콸 쏟아내는 대신 찬 바람을 맞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늦게 만나 결혼해서 애틋함과 감사함이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났던 베키오 다리 옆에는 피렌체 최고의 젤라토 가게가 있다. 콘을 들고 나와 베키오 다리의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얼마나 좋으면 내일 아침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오자고 말하는 센스. 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피렌체에서 낭만에 물들어 시간이 멈춘 듯했다. 피렌체의 모든 곳에는 공기에서도 아이스크림이 녹아있는 듯 달콤하고 기분좋은 냄세가 났다. 


강윤선 





이전 09화 우리 집으로 가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