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나무와 아기
내 남편의 별명은 리몬(터키어 Limon: 레몬)이다. 리몬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터키에서 독일 중고등학교에 다녔다. 피부가 노르끄므레한 유일한 동양 아이가 과즙에 시트르산이 많이 들어있어 신맛이 나는 선명하고 맑은 노랑을 띤 레몬을 곶감 먹듯이 잘 먹어서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레몬을 어쩌다 먹게 된 거냐고 물으니 친구들과 테킬라를 즐겨 마셨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교회 오빠 같은 이 남자가 학창 시절부터 테킬라를 잘 마셨다니 의외였다.
결혼 후, 첫 이사를 했다. 집에 빛이 잘 들어 나무를 키우려고 양재 꽃시장에 갔다. 떡갈 고무나무를 사러 가자. 잎이 커다란 키 큰 나무를 사러.
나무들과 사람들로 훈훈한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무나무가 유행인지, 크고 짙은 초록 잎이 길쭉길쭉한 나무들을 구경했다. 키 크고 잘생긴 나무들을 두리번두리번 멀리서 찾다가, 내 발 앞에 레몬이 열린 나무를 봤다. (내 옆에 남자도 가까이서 찾았는데, 키가 크고 눈에 띄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파리에서도 레몬 향기가 났다. 꽃이 피면 꽃 냄새도 좋단다. 15년 된 레몬 나무란다. 테라코타 빛깔의 베이지색 화분, 노란색 레몬과 녹색 이파리가 잘 어울렸다.
사랑스러운 레몬이 달랑달랑 달린 나무와 동남아풍의 멋진 고무나무도 함께 우리 집에 데려왔다.
레몬 나무에서는 레몬 세 쌍둥이가 열려있다. 한 나무에서도 크기와 빛깔이 조금씩 다르다. 길고 얄쌍한 팔에 레몬이 열린 걸 보니 마른 여자가 임신하여 배만 뽈똑 나온 모양이다. 나도 귀엽게 반짝이는 아이를 갖고 싶다. 레몬처럼 동근 배를 갖고 싶다. 온전하게 자랄 때까지 가지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말아라.
가장 크고 잘 익은 레몬이 먼저 떨어졌다. 한동안 먹지 않고 냉장고에 두었다. 첫 수확물이라 집에 손님이 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자고 했다. 며칠 후 뒤통수 너머로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꼭 둘째 같이 생긴 레몬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개가 힘겹게 달려있다. 아직 작은 데다가 푸르스름한 점들은 아기 엉덩이 몽고반점 같다.
영양분이 부족한지 피부가 쭈글쭈글하다. 잘 붙어있기를. 아직 흙의 영양분을 받고 햇살 인큐베이터 중이다.
3개의 열매가 다 지고, 그 자리에 배꼽 딱지가 생겼다. 햇살을 충전하고, 새로운 자리에 꽃봉오리가 착상했다. 처음 보는 흰 레몬 꽃이 피었다. 꽃에서도 신기하게 레몬 향이 난다. 종자가 그렇다. 레몬 나무 자식이니 레몬 시리즈다. 초록 잎에서도, 꽃에서도 가지에서도 레몬 향이 배어 있다.
이사 온 지 1년이 지났다. 한 해 동안 코로나를 오롯이 지나왔고, 시험관 아기를 준비했었다. 병원에는 사람이 늘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초음파와 주사의 연속에도 기쁨과 기대로 아무렇지 않게 병원에 다녔다. 나무가 잘 자라게 화초 영양제를 꽂듯이, 나도 배에 주사를 자주 맞았다. 내 아랫배는 보라색 푸른색 꽃이 배에 자주 물들었다.
처음으로 시험관 아기를 냉동 이식했을 때, 2주 후에 임신이 되었는지 피검사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피가 말랐다.
첫 시험관에 바로 성공이었다. 난 오늘부터 임신 2주 차다.
모두 나에게 꼼짝도 말란다.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로 산책도 쇼핑도 조심조심. 행복한 자체 감금자가 격리하기로 했다. 내 안에도 생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온몸으로 티가 났다. 몽실몽실하게 등에 살이 붙었다. 한낮에 꾸벅꾸벅 자주 졸기도 한다. 과일, 생선이 나오는 태몽 같은 맛있는 꿈에서 깨면 둥그레진 팔뚝과 가슴을 부대끼며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자주 간다. 커진 자궁만큼 부푼 뱃살을 두 손으로 감싸 안는 행동 변화가 생겼다.
나는 레몬 나무 앞에 종종 앉는다. 내 몸속에 자라는 작은 생명을 느끼며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매끈하고 새포름한 광이 나던 작은 이파리는 겨우 내 잎맥이 푸르퉁퉁한다. 잎맥은 나이 든 손가락 관절처럼 도드라지고 잎은 커지고 엽록소는 옅어졌다. 그러고 보니 레몬이 열리고 꽃이 핀 지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무에게 아무 소식이 없었다. 발랄한 생명은 간직하고 있지만, 탄생의 움직임이 없었다. 마른 채로 조용히 멈춘 거 같았다. 달력에 물 주는 날을 써놓고 잊지 않았다. 노오란 영양주사도 흙에 90도로 꽂는 모습이 꼭 내 아랫배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제 다시 꽃이 피고 레몬이 열릴지 기다리며 조급했다.
이제 임신 3주 차다. 병원에서 피검사 수치가 지난주에 비해 높아져 정상수치다. 매주 고비다. 주일 오전 예배를 마치고 모처럼 날씨가 따뜻했다. 오랜만에 나무를 구경하러 꽃시장에 가자고 남편을 졸랐다. 우리 집 레몬 나무가 왜 그런지,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는지 가서 물어보자며 외출할 이유를 만들었다.
오랫만에 찾은 꽃시장에는 이제 레몬 나무가 많이 보였다. 가게 주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타이밍을 기다렸다. 면으로 된 턱스크를 하고 있어서 거리를 두고 우리 집 레몬 나무 증상에 관해 물었다.
햇빛과 수분이 집이랑 맞지 않아서 잎이 그런 거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야 하는데 안 그런 건 한 마디로 사람으로 표현하자면 유산이 된 거지.
기분 나쁜 단어가 나와 체하듯 움찔했다. 말 한마디에도 예민한 상태라 마음이 불편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거북하고 찜찜했다. 그냥 집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주 차에 초음파를 보러 간다. 아기가 잘 착상을 했는지 볼 수 있다. 자궁에 점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매일 프로기노바 3번과 질정을 넣었다. 격일로 배에 주사도 맞았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디테일과 과정들이 나의 루틴으로 즐거운 노력이었다.
5주 차 초음파로 아기집이 커진 것을 확인했다. 6주 차에 아기집 안에 난황도 생겼다. 생명이 찾아오는 기쁨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7주 차에 아기집이 커지고 태아 심장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주변 사람들한테 임신했다고 임잉아웃을 해도 될까?
그런데 자꾸 불그름한 피가 난다.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검색창에 매달려 눈이 아프다. 피가 나면 안 좋은 거라는데 불안감에 조바심마저 든다. 매주가 고비다. 확인을 해야만 한 주 안심하고 산 넘어 산이다. 다음 주까지 또 초음파를 보고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하러 가는 날만을 기다렸다.
8주 1일째, 한 주 동안 피가 계속 나서 초음파를 보러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모니터로 초음파를 선생님과 함께 보는데, 아기집 크기가 지난주와 차이가 없다. 그리고 우렁차야 할 심장 소리가 조용하다. 아기가 멈췄단다. 멈춘 심장이 다시 뛰지는 않지만, 그래도 며칠 후, 다시 한번 보기로 했다.
초음파를 보는데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기가 더 이상 나와 음식과 숨을 나누지 않고 텅 빈 진공 속에 웅크리고 멈춰있었다. 8주간의 기쁨과 설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대감에 배보다 마음이 더 부풀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굳어있던 밥알처럼 내 몸에서 떨어졌다. 빠져나가지 말고 붙어있으라고 아픈 배를 움켜잡았다. 버티지 못하고 뚝뚝 눈물처럼 떨어지는 피는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아쉽게 흩어졌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내가 아기 갖기를 소망하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다시 하면 되는 거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다음에 찾아오겠지라는 쿨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뭐든지 잘 돼야 한다고 조바심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너무 힘을 주고 살았다. 느긋해져 볼까. 힘을 좀 빼볼까. 그런 삶의 태도가 되기 위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아기가 편하게 찾아올 수 있도록 편한 사람이 되어보자.
집에 들어서자마자 꽃향기가 난다. 레몬 나뭇가지에 터질 듯 맺혀 있던 작은 꽃봉오리가 해끔하게 터졌다.
1년 만에 다시 보는 꽃들이다. 우리 집에 가득 퍼지는 레몬 냄새를 맡고 입덧을 넘어가는 꿈을 꾼다. 레몬이 곧 또다시 열린다는 태동을 알리는 신호다. 레몬 나무를 보며 내가 할 일은 뱃속에서 태어날 아기를 온전히 기다리는 일뿐이다.
봄이다. 모든 게 다, 다시 시작이다.
강윤선
2021년 식목일에 우리 집 창가에 앉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