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잠깐 숨을 돌리면서 갖는 커피타임은 인간관계를 맺기 좋은 시간이다. 자신만의 일에 몰입해 있다가도 잠깐 고개를 들어 옆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커피타임 덕분에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주변 여성 동료와 서로의 고충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아이 문제나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커피타임은 회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야기를 내가 이끌어갈 필요도 없다. 그저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듣다 보면 상대의 필요를 세심하게 챙길 수 있고, 적절한 조언도 해줄 수 있다.
쇼핑호스트 후배 중 이런 커피타임의 수다를 통해 서로에게 진심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좋은 기억들이 있다. 지금도 이들은 힘들 때 나에게 편하게 ‘커피 한 잔 해요, 선배님’이라며 찾아온다.
물론 이런 방법이 적극적인 인맥관리는 아니다.
하지만 꼭 인맥이 넓어야 좋은 걸까?
요즘은 SNS까지 활발해져서 명함 하나만 주고받아도 다음 날이면 SNS 친구가 되어 있는 세상이고, 일 년에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연락처가 주소록을 더 많이 차지하는 강제 인맥 시대라서 오히려 인맥 다이어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넓지는 않아도 하나의 관계라도 깊게 제대로 맺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관계만큼은 드립커피처럼 천천히, 진하게, 아날로그가 좋다.
인맥관리 할 것인가, 인간관계 맺을 것인가
내가 이런 인간관계에서 깨달은 게 있다.
흔히 인맥 ‘관리’에 방점을 찍는 사람은 상대가 잘 됐을 때만 연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한다. 그런데 인간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상대방의 지위고하, 역할의 경중을 막론하고 상대가 좋아서 연락하고 상대가 잘되길 응원하는 인간애정의 맥락이 있다.
상사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 관리하려고 하지 마라. 오히려 그들을 서포트하는 사람들이나 큰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 형성의 정성을 들여라.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얻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친한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의를 지키기 위해 거절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거절은 무례한 행동이 아니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지 않으면 온갖 쓸데없는 것들이 내 시간을 점령해버린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자신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가 거절하면 인간관계가 어색해지겠지?’라고 걱정하지 말자. 그렇게 해서 정리될 관계라면 오래갈 수 없다.
인맥관리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방식을 좀 더 자유롭게 생각하자.
예전에 업무가 끝나고 술 한잔은 해야 인맥이 만들어진다, 진해진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면 종일 붙어 다니면서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헤어지면서 ‘나머지 얘기는 이따 전화로 하자구!’ 말하던 관계들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가족이 생기고 육아를 하게 되면 퇴근 후에도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제2의 출근을 해야 한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지는데 예전 같은 방식의 인맥 쌓기는 어렵다.
이대로라면 나 같은 워킹맘은 평생 인맥관리가 불가능한 걸까? 결혼과 출산과 함께 퇴직하게 되는 진짜 경단녀가 아니더라도, 회사는 다니지만 그 안에 인맥관리나 네트워크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잠재적 경단녀가 된다.
이 알고리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꼭 같이 술을 마셔야 친분이 쌓이는 건 아니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는 자기 일이 끝났다고 허겁지겁 퇴근하는 게 아니라 동료나 선배의 일도 도와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친밀감이 생기고 우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도와줄까?”라고 이야기했을 때 “얼씨구나” 하며 몇 시간의 야근거리를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서로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고마운 거다.
그리고 저녁보다 점심식사 시간을 활용하자.
나는 특히 다른 업무 파트의 사람들과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평생을 같은 자리에서 근무하는 게 아니므로 다른 직무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감을 얻고 흐름을 읽는 것이 도움되기 때문이다.
인맥 관리를 단순히 나의 성취에 대해 보여주고 현재의 실질적 도움을 주고받는 것에 포인트를 둔다면 나의 방식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와 너의 관계’가 가지는 건강함, 서로의 내면이 건강해질 수 있도록 힐링을 주고받는 관계에 포인트를 둔다면 나의 방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삶의 목표가 같은 사람들과 만남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했다.
30대 초반에는 자기 분야에서 성장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회사를 벗어나서 인맥 만들기 자체에만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만드는 법’이나 ‘자기계발’, ‘자기 연마’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아군들과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내 경우에는 ‘YWCA 직장여성 인문리더십스쿨’과 ‘성주재단 글로벌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직장을 다니면서도 수업을 듣기에 좋도록 저녁과 주말 수업으로 운영됐고 비슷한 고민을 가진 여성들이 연대를 이루기 좋도록 운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지역에 따라 이와 비슷한 모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에 맞춰 선택해보는 것도 좋다.
일단 기준은 단기적인 모임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모임, 연대를 형성하고 작게라도 변화를 실천하는 모임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칭찬에서 인간관계는 시작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솔직히 인맥관리가 뭔지 잘 모르겠다. 명함을 정리하고 기념일에 축하 문자를 보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
가끔은 나도 인맥관리를 정말 잘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답답하기도 하다. 그럴 땐 주변에서 따라 하고 싶은 인맥의 롤모델을 참고해본다.
내가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하는 <건강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예전에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기획해서 실버계층의 소비자를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이다.
건강에 대한 정보, 레시피, 지역 축제나 음식 궁합을 홈쇼핑 방송에서 함께 전해주는 독특한 콘셉트인데, 이 방송을 계기로 이지연 아나운서를 곁에서 보면서 인간관계의 큰 법칙을 이해하게 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이 차가 꽤 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홈쇼핑은 내가 잘 모르니 잘 알려달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다. 방송 경력으로는 이미 교육자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런 겸손함 자체가 송구했다.
그 뒤로 300회 가까이 진행하는 동안 이지연 아나운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스태프들, 방송 관계자들의 장점을 보면 항상 어떻게든 반드시 칭찬을 하셨다. 아주 작은 칭찬이어도 방송 때 ‘나이는 어려도 @@씨에게는 배울만 합니다.’라며 꼭 언급한다거나, 방송이 끝난 후에라도 반드시 ‘@@는 참 좋았다’고 칭찬하셨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번의 대화를 건네더라도 농도를 진하게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래서 단순히 명합첩 채우는 인맥관리 네트워크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로를 위할 수 있는 찐인간관계, 늘 무너지기 쉬운 멘탈 앞에서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되는 관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