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어린이집 친구 중에 갑자기 이사를 간 친구가 있었다. 아이는 한동안 친구를 그리워했고 종종 찾았다. 그러다 그 친구의 사촌 동생이 우리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찌어찌 우리 아이와 그 아이, 그 아이의 사촌 동생까지 모두 다 같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아이 친구의 이모가 그 친구의 아빠는 볼일이 있어 조금 늦게 온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여서 별생각 없이 물었다.
“엄마가 안 나오시고 아빠가 나오시네요?”
“아, 언니가… 이혼을 했어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 친구의 이모.
“아 그렇구나. 사실 저도 이혼했어요. 하하”
민망할까 봐 나도 재빨리 커밍아웃을 하며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갑자기 이사를 갔던 거였구나. 예전에 아이가 그 친구는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인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아빠와 함께 잔다고 했었다. 그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날 아이 친구 아빠는 키즈카페에 느지막이 도착했고 모든 아이들과 몸이 부서져라 놀아주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옷차림에 작고 갸름한 얼굴과 또렷한 콧날. 누가 봐도 영락없는 대학생 삼촌 같은 모습이었다.
서로를 그리워하던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만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서로의 교회에서 하는 여름성경학교에 같이 가기도 하고 다 같이 만나 주말을 보내기도 했다. 아이 친구의 아빠인 그는 알고 보니 나보다 2살이 더 어렸다.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누나로서, 이혼 선배(?)로서 성심껏 대답도 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친해졌고 아이들 없이 따로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처지가 같으니 공감도 되고 서로의 아픔도 이해하니 말도 잘 통해 같이 있는 게 점점 편하고 즐거워졌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그가 사 온 치킨을 뜯으며 지나온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면 그동안 이사 와서 변변한 친구 없이 외로웠던 나도 이 동네에 좋은 친구 하나쯤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순간순간 나를 바라보는 선한 눈빛,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워내며 살림을 해나가는 나를 격려하고 내 바쁜 일상과 내 한마디 한마디에 칭찬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그가 처음엔 낯설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했지만 참 고맙고 기분 좋았다.
나를 좋아하나? 하는 궁금증이 확신으로 넘어갈 즈음, 그는 나에게 고백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남을 시작했다. 나를 많이 아껴주고 사랑해 준다는 걸 너무 잘 느낄 수 있게 해 주던 그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다.
내 아이와 친구였던 딸아이와 그 아래 남동생 하나. 육아관이 조금은 자유분방하고 상당히 허용적인 아빠 밑에서 커서인지 둘째의 어떤 행동들은 내가 보기엔 너무 불편했다.
아이를 둔 사람과 연애한다는 것은 보통의 연애와는 완전히 다르다. 달콤해야 할 데이트는 정신없는 육아의 현장으로 바뀌고 상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도 수시로 건드려지며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잃고 싶지 않은 친구이자 인성을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지만 이렇게 현실을 함께 허덕일 만큼 내 그릇이 크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리고 그와의 짧은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이별을 후회하진 않았지만,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언제나 내게 사랑을 맘껏 표현하고 내 모든 걸 응원해 주던 사람이었기에 종종 생각나는 건 당연했다. 진심으로 행복을 빌었기에 그가 재혼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땐 정말 잘됐다고도 생각했지만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마음도 함께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난 이제 사랑 불구자인 건가 싶은 패배감도 밀려왔었다. 나는 왜 누군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는 이렇게 못된 걸까 하는 깊은 자괴감도 들었다. 모처럼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난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일까.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자책하면서.
연애든 인간관계든 상대의 모든 게 좋을 수만은 없다. 하나가 좋으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나쁘다. 아니, 인간관계뿐 아니라 세상만사 모든 이치가 그렇다. 적어도 내 경험상 그랬다. 좋은 사람과의 연애는 행복하고 외롭지 않겠지만 인내와 희생을 요구한다. 혼자의 자유롭고 편안한 일상은 가볍고 산뜻하겠지만 고독과 허무를 수반할 수 있다. 각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잘 견딜 수 있는 것을 따라가야 할 뿐이다. 더구나 나는 내 아이에게 줄 희생과 인내만으로도 벅차다. 희생과 인내를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의 과거의 남자들, 다가올 미래의 남자들을 부탁하는 게 모두에게 더 효율적인 처사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다시 솔로가 된 그와 편안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정보도 교환하고, 각자 아이를 상대에게 맡기기도 하면서 상생의 관계로 정착 중이다. 늘 동네에 이런 친구 하나쯤은 있으면 했지만 잃은 줄 알았었는데. 그래도 잃지는 않은 것 같아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