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눈에 갇힌 외딴 산장에서’를 읽었다. 연극 무대인 양 시작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사이코패스가 계획한 잔혹한 살인 사건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데 결국은 삼중 구조의 연극으로 밝혀진다. 소설 내용 중 어떤 부분은 등장인물이, 어떤 부분은 독자가 있을 수 없다고 여길 법한 일이라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무심코 넘길 뿐 일상에도 예상치 못한 일은 곧잘 벌어진다. 이번 전시회에 필요한 인쇄물의 디자인을 맡은 지나 님은 참여작가 16인을 대상으로 작품 공모를 진행했다. 디자인에 활용할 그림을 다 함께 투표로 정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내 그림은 당연히 뽑히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모로 고민했을 지나 님은 그림을 여러 컷 쓰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자연스레 투표 순위로 디자인에 활용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결국 도록, 현수막, 초대장에는 나를 포함해 여러 작가의 그림이 실렸다. 생각지 못했던 일에 많은 회원이 즐거워했다.
나는 초대장이 가장 흥미로웠다. 거기엔 목계의 한 식당 그림이 실렸다. 그림은 아름다우나 상호가 드러나 초대장용으로는 약간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후보 그림이 거론되는 사이, 지나 님은 재치 있게도 그림은 그대로 두고 간판만 ‘충주어반’으로 바꿔 달았다. 마침 그림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그걸 본 내 머릿속에서는 어반(urban)이 어반(魚飯)으로 치환되었다. 당장 그림 속 식당에 찾아가 백반을 주문해 먹고 싶었다. 따끈한 밥에 노릇하게 잘 구워진 생선 한 토막, 나물 몇 가지와 김치. 후식으로 구수한 누룽지 끓인 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충주어반 식당이지만, 이제는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위의 그림을 그린 날, 카페 상호 타임(thyme)에서 영감을 얻어 초단편소설을 썼었다.
제목: 타임
그림은 벽에 비스듬히 세워있었다. 캔버스 가득 연보랏빛 자잘한 꽃이었고, 세밀하게 그려낸 꽃잎마다 파랑과 빨강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은 보랏빛이 넘실거렸다. 그녀가 전시회에 내놓을 작품이라고 했다. 나는 그림의 제목을 물었다. 퍼플 타임이라는 대답에 알아들었다는 듯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발음이 다소 어색했지만 되묻는 건 예의가 아닐 듯했다. 나는 제목을 다시금 곱씹었다. 퍼플 타임, 보라색 시간이라. 어떻게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녀와 세 번째 만나는 날이었고, 나는 그녀의 화실에 방문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그녀를 보고 싶어 일부러 찾은 거였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오래 머무르려면 어떻게든 그림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가 보라색 꽃을 계속 그려댄 시간을 말하는 걸까.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라는 노래 가사에서처럼 몽환적이고 감미로운 감정을 표현한 걸까. 남자를 파랑, 여자를 빨강으로 단순화하는 게 좀 우습더라도 남녀의 몸과 마음이 뒤섞인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걸까.
옆에 선 그녀의 눈길이 느껴졌다. 지난번 만났을 때 내가 그림 감상을 좋아한다고 했기에 그녀는 분명 내 반응이 궁금할 터였다. 나 역시 그럴싸한 감상평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최근 들어 미술 관련 책도 읽고 있었다. 그래봤자 퍼플 타임이라는 제목만 들었을 뿐인데도 당장 타임아웃을 외치고 싶었다. 머릿속이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색감이 정말 오묘하고 아름답네요, 정말 세밀하게 표현하셨네요, 정말이지 그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주절거리는 말을 빙긋 웃으며 듣던 그녀는 잠시 뒤 차를 내왔다. 백리향 차라고 했다. 그녀는 백리향의 향은 꽃이 아닌 잎에서 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것도 잎을 비벼주고 쓰다듬어주어야 난다고. 또한 백리향의 꽃말이 용기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저 네, 아 그렇군요, 정말 향긋하고 좋습니다, 하는 추임새만 반복했다. 그녀는 나머지 그림은 전시회에서 직접 보라며 눈을 찡긋했다.
나는 화실을 나와서도 퍼플 타임이 무슨 의미일지 고민했다. 내가 우물쭈물 화실에서 나가지 않으니 그녀가 괜히 차까지 우리며 이야기를 하느라 애쓴 듯해 미안했다. 전시회에 가서라도 작품에 대해 뭐라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알아주는 이를 사랑하지 않을 예술가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빼곡하게 펼쳐진 보라색 꽃 그림이 그녀처럼 곱고 예뻤다는 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녀의 전시회 오픈일이었다. 나는 깔끔한 수트를 챙겨 입고 꽃다발도 준비했다. 오늘이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생각도 들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논문을 읽고 실험만 하면서 괜히 그림을 좋아하는 척 허세를 떤 게 부끄러웠다. 전시회장의 그녀는 관람객 사이에서 인사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잡을 수 없는 나비 같았다. 나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멀찌감치서 그녀와 눈인사를 나눈 뒤 예의 보라색 작품 앞에 섰다. 작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기어코 찾아내야 했다.
벽에 걸린 그림 오른쪽 아래, 제목이 붙어 있었다. 설핏 봤는데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제목에 머리를 들이대고 읽어보았다. Purpetual Thyme. 뜻밖에도 퍼플 타임이 아닌 퍼페추얼 타임이었다. 타임은 백리향으로 불리기도 하며 향신료로 사용된다는 설명도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그림을 봤다. 제목 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백리향이었다. 내 마음대로 넘겨짚은 게 민망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퍼뜩 그녀가 알려준 백리향의 꽃말이 기억났다. 용기. 나는 이제껏 쑥스러워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이제 용기를 내야 할 타임인 듯했다. 어깨를 펴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꽃다발을 건네었다. 그녀는 활짝 웃었다. 지금까지 만나며 본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