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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작가 imkylim Sep 09. 2024

블랙 포레스트

  카페 남산 422에서 정기 모임이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지나 님은 블랙 포레스트를 주문했다. 나는 먹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케이크였다. 위에는 얇은 초콜릿 시트가 듬뿍 뿌려 있고 검은색, 갈색의 촉촉한 스펀지케이크가 번갈아 층을 이루고 있었다. 속에는 체리가 박혀있다고 했다. 가만히 케이크를 쳐다보니 나무껍질과 나뭇잎이 켜켜이 쌓인 숲 바닥과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층이 떠올랐다. 안에 숨어 있다는 체리는 땅속 생명체 내지는 보물? 어쩐지 흥미로워 눈앞의 케이크를 그리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어반처스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음식이 그릴 대상이 되면 차마 먹지 못한다. 나눠 먹자고 사 온 케이크를 나 때문에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할 수는 없었다. 대강 완성한 다음 내가 먼저 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그리던 사람이 먹어야 아, 이제 먹어도 되나보다, 할 테니까. 

    먼저 초콜릿 시트. 혀에 닿자마자 부드러운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초콜릿에 있는 지방은 상온에서는 고체지만 입안에 들어가면 바로 녹기에 사람이 초콜릿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하단의 케이크 층은 검은 숲의 토양인 양 촉촉했다. 숨겨져 있던 체리는 상큼하고 씹는 맛이 있었다. 맛본 케이크의 느낌을 그림에 더하고 싶었다. 녹녹한 수분감을 주려 화이트 젤리롤을 놀려봤다. 그래봤자 단단하고 건조해 보이기만 했다. 설핏 맘모스 빵을 썰어놓은 양 보일 정도였다. 부족한 재주가 영 아쉬웠다.


  모임을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 각자 그린 그림을 모아서 늘어놓았다. 뜻밖에도 블랙 포레스트 그림에 눈길이 집중되었다. 우리 어반처스가 워낙에 칭찬과 격려에 후하기는 하지만 맛있어 보인다, 잘 그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림에 들어앉은 게 블랙 포레스트와 다를지라도 먹을만해 보이는 상황인 것 같았다. 여하튼 좋다는 말을 들으니 살짝 으쓱해지기도 했다. 케이크를 사 준 지나 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니가 이 케이크 안 사줬으면 어쩔 뻔?


*블랙 포레스트(슈바르츠발트): 독일의 전통 케이크. 독일 남서부의 삼림 지대 명칭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함. 

  이 글을 쓰고 며칠 뒤, 작가 성석제 님의 ‘칼과 황홀’이라는 책을 읽는데 슈바르츠발트가 언급된 부분이 있었다. 슈바르츠발트, 들어봤는데? 싶어서 생각해 보니 블랙 포레스트였다. 그는 케이크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검은 숲의 서늘한 냉기를 크리스털 바이젠 비어에서 느꼈다고 썼다. 맥주는 보통 차갑게 마시지만 그런 시원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맥주를 언젠가 꼭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백독(百讀)이 불여일음(不如一飮)이라, 백번 읽는 것보다 한 번 마셔보는 게 낫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그림을 한 장 더 그릴 시간이 있었다. 뭘 그릴지 고민하느라 두리번거리는데 지나 님과 엘린체리 님의 앞에는 먹다 만 블랙 포레스트가, 뒤에는 초록빛 가득한 남산자락이 보였다. 앞뒤에 숲을 두고 그림 그리는 두 사람. 나는 당장에 붓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림 속 인물이 둘을 닮지 않았다. 저널 북을 앞으로 내밀며 부탁했다. 그림 속 각자의 옷에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표식을 좀 그려 달라고. 지나 님은 초대장 작업을 하면서 디자인했다는 수달 화백을 그렸고, 엘린체리 님은 귀여운 글씨체로 또박또박 이름을 써줬다. 이로써 부족했던 그림이 만족스럽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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