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 사과와 복숭아 과수원이 많다지만 크고 작은 옥수수밭 또한 흔하다. 여름날 월악산 방향으로 차를 몰고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수북하게 쌓아둔 옥수수가 보인다. 펄펄 끓는 커다란 냄비에서 갓 꺼낸 옥수수를 파는 곳도 심심치 않게 있다. 충주에 살기 시작하고 맞았던 첫여름, 대학 찰옥수수를 광고하는 현수막을 몇 개나 지나치다가 마침내 삶은 옥수수를 한 봉 샀다. 찰지고 맛있었다. 그다음 날 시댁에 갈 계획이었는데 시어머님이 옥수수를 아주 좋아하신다는 게 떠올랐다. 냉큼 두 자루를 샀다.
시어머님은 옥수수는 따서 바로 삶아야 맛있다면서도 당신을 생각한 아들 며느리를 어여삐 여기셨다. 프로 같은 모습으로 옥수수를 찜통에 차곡차곡 담고 소금과 설탕도 조금 넣으셨다. 한 시간쯤 지나 접시 가득 뜨끈한 옥수수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옥수수를 입에 넣자마자 전날 먹었던 옥수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옆에 앉은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은 커피를 잘 내리는 곳에서만 마시는 것처럼 오랫동안 옥수수를 사랑해 온 시어머님도 아무 옥수수나 드시지는 않을 거였다. 그런데도 그날 옥수수를 많이 드셨다. 삶아낸 옥수수는 식혀서 냉동실에 넣으셨다. 많기도 했다. 두 자루나 산 게 죄송스러웠다. 자식이 주는 건 뭐든 소중히 여기시는 모습에 뭘 드리더라도 제대로 된 걸 드려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딴 옥수수는 가능한 한 빨리 삶아야 한다는 것도 확실하게 배웠고.
충주에 오래 살다 보니 옥수수를 사는 일이 거의 없다. 농사지은 거라며 주변에서 옥수수를 주곤 한다. 한두 개가 아닌 자루째. 보통은 스무 개에서 삼십 개 정도인데 가끔은 백 개가 들어있는 자루도 있다. 잊지 않고 챙겨주는 정이 무척 고맙다. 문제는 남편이 누군가에게서 옥수수를 받았다고 금방 퇴근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난 옥수수는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다급했다. 아무리 밤늦은 시간이라도 옥수수를 우수수 쏟아놓고 부지런히 다듬어 냄비에 넣었다. 그랬는데 맛이 없으면 그 많은 걸 도대체 어쩌면 좋을지 몰라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옥수수를 다듬느라 지친 손목이 괜히 더 아팠고, 쓰레기 봉지마다 가득한 옥수수 껍질을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두어 개만 삶아본다. 맛있으면 나머지도 삶아 냉동실에 보관한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지, 싶으면 미련 없이 말린다. 그리고 알만 떼어내 볶는다. 영롱한 알갱이가 된다. 나, 이래 봬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야! 하는 허영심을 보태어 표현하자면 퀴나크리돈 골드 빛이다. 이어지는 서늘한 계절 내내 구수한 옥수수차를 끓여 마신다. 수확한 지 시간이 지났을 뿐 아무런 죄가 없었던 옥수수와 맛있는 걸 먹고 싶었을 뿐 악의는 없었던 내가 어우러진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만약 나중에, 내 아이들이 옥수수를 사 왔는데 맛이 없으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할까. 서슴지 않고 말릴 것이다. 옥수수는 말이지, 시간이 지났으면 말려서 차로 마시는 게 좋아.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데 내 아들과 살아주는 며느리라면? 조금 더 길게 고민해 본다. 음…… 아마 똑같게 말할 것 같다. 대신 목소리 톤을 조금은 더 부드럽게 하려나?
이번 여름에도 우리 집 발코니 창가에는 어김없이 옥수수가 말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