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는 없지만 한 편의 영화는 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Maşallah Inşallah
마샬라 인샬라

터키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했던 말은 Maşallah(신이 도왔다) 그리고 Inşallah(신이 도울 것이다)였다. 그 사고를 통해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우리에게 Maşallah라고 했고, 우리와 헤어지며 다시 만나자는 인사 끝에 다시 Inşallah를 붙였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신에 의해서 이뤄지기에 인간은 그저 그것에 순응하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갈 뿐. 이슬람 문화가 깊이 배어있는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에 신의 도움이 함께 한다는 것을 믿고 또 기대하며 살아갔다. 그들과 우리는 참 달랐지만 참 닮아있었다.


터키에서 보낸 2달의 시간들 중 한 달은 라마단 기간이, 나머지 2주는 바이람이 끼어있었다. 그렇게 터키 가족들과 민족의 대명절을 함께 보내며 친척집을 방문하고 성묘를 다니는 동안 마치 그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현지 of 현지인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낯설기만 했던 그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나에게 터키는 더이상 낯설은 외국이 아닌 친근한 나라가 되었고, 그들에게 나는 더이상 머나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 아닌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아름다웠던 그곳 알라손에서 가족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며



귀국과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

사고가 난 지 1달 반 만에 깁스를 풀었다. 안쓰럽게 가늘어진 오른팔은 아직 수건 한 장조차 들 수 없을만틈 약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몸에 붙어서 움직여주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조금씩 걷고 앉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나는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내 몸집만한 배낭을 매어 보고, 다시 물건을 덜어내길 여러번. 배낭을 가득 채웠던 여행짐들을 덜어내 한국으로 부쳤다. 보름만에 그 짐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몇일 뒤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고 하나둘씩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터키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바바의 고향인 Adrasan으로 온 가족이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지난 2달간 우리가 지내던 방을 정리하고 짐을 싸는 동안 이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같이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떠날 가족여행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끔 마마는 '우리가 가고 나면 어떻게 하냐'며 눈물을 훔치시곤 했다.


함께한 시간 동안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들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콩이가 그려준 우리의 여행 그림을 부러워하던 젤리하가 떠올랐다. 나는 콩이에게 연락해 가족사진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다.


마음을 담는 방법

안탈리아를 찾았던 날 우연한 기회로 만난 터키인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파투마누르. 한국문화와 드라마를 좋아해 한국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던 그녀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녀를 찾아가 터키어로 편지를 적어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부르는 대로 그녀가 받아써준 편지에는 그간 우리에게 베풀어준 가족들의 사랑과 그들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외국인에게 베풀어준 그들의 애정은 그럴싸한 체면치레나 예의가 아닌 진심 어린 사랑이었기에 우리가 받았던 진심에 대한 우리의 진심을 들려주고 싶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곳에서 저희 부모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마마 바바의 소중한 딸과 손자를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 함께하는 동안 속상하게 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주세요. 한국에 돌아가서도 자주 연락할게요. 다시 만날때 까지 건강하세요. 바바는 담배를 끊으시고 마마는 차이에 설탕을 조금만 넣어드시기로 약속해요. 사랑합니다.'


우리는 편지와 함께 여행 경비로 뽑아두었던 터키돈을 몽땅 담았다.그리고 밤낮으로 우리를 거 둬 먹이느라 고생한 마마 바바에게는 최고급 호텔 숙박비 명목으로, 월급이 끊긴 젤리하에게는 아르다의 학비에 보태달라는 말을 적었다.


사상 최저치로 떨어져있던 터키 리라환율 덕에 우리는 넉넉히 마음을 담을 수 있었다. 비록 그 돈이 결코 우리의 마음을 대신 할 수는 없겠지만,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 가족에게는 다음 삶을 이어나갈 돈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거나 그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단이 되어 줄 때 돈은 가치로울 수 있다'던 남편의 말에 새삼 공감이 되었다.

콩이와 파누르의 도움으로 완성된 우리의 선물

터키를 떠나기 전날 밤. 마지막 식사를 마친 우리는 모두가 있는 곳에서 준비한 선물들을 꺼냈다. 콩이가 그려준 가족사진을 받은 가족들은 깜짝 놀라며 행복해했고, 봉투에 든 돈을 보고서는 받을 수 없다며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니 제발 받아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고 거듭하고서야 옥신각신 봉투를 주고받는 씨름을 멈출 수 있었다.


'함께한 시간 동안 혹여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건 잊어주고, 우리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만 남기자고. 이제 우리 삶에 아프고 힘든 시기들이 지나갔으니 우리에겐 행복할 일들만이 남아있을 거라고.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지자고..'


편지에 적힌 터키어를 읽을 줄도 모를뿐더러 당시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을 더듬더듬 전했던 터라 우리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건네준 편지를 한참 붙들고 있던 마마 바바와 젤리하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걸 보면 잘은 몰라도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소중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국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지만 우리는 애써 웃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출국 게이트 앞까지 마중을 나온 가족들을 끌어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바바는 우는 나를 안아주며 말씀해 주셨다.


Hayat devam ediyor
인생은 계속된다


짧지만 강렬한 그 한마디 말이 마음에 쿵하고 와 닿았다.


우리가 당한 사고에도 우리의 삶이 계속되었듯이, 비록 우리가 이곳에서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더라도 우리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맺었던 그들과의 인연도 계속될 것이기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려 한다.


다음 목적지는 대한민국.

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드디어 한국, 다시 병원

이스탄불 공항에서 출발한 지 30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10만 원이나 더 주고 끊은 비상구 좌석조차 내가 앉아있기엔 턱없이 불편했고,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온몸은 비명을 내질렀다. 결국 승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비행기 바닥에 누워서 실려왔다. 비상구 문 틈으로 들어치는 외풍에 노숙을 한 듯 몸이 찌뿌둥했다.


한국어로 쓰여진 간판이 보이고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려왔지만 여전히 한국에 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짐을 챙겨 도착한 입국 게이트. 멀리서 보이는 소라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났다. 달려갈 수 조차 없는 느린 걸음. 나는 한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라의 온기를 마주하고서야 내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조금 믿겨졌다.


소라의 차를 타고 1시간 떨어진 병원으로 향했다. 입원 소속을 밟자마자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검사가 시작됐다. 냉기가 흐르는 MRI실 터널 안. 온몸에 털이 선채 옴짝달싹 하지 못한 상태로 한참동안 귓전을 때리는 기계음을 듣는 것은 견디기 버거웠다. 그렇게 낮 12시에 시작된 검사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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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클래스 대신 방바닥 클래스 탑승 / 큼지막한 쇠심이 2개나 자리잡은 내 팔

정밀검사 결과는 처참했다. 어찌어찌 뼈를 붙이고 살려는 놓았으나 구석구석이 엉망진창이었다. 그저 똑하고 두 동강 난 줄만 알았던 팔목은 가루처럼 으스러져있었고 근처 인대며 근육까지 이곳저곳 다 터져 성한 곳이 없었다. 제자리에 돌아와 회복되고 있는 줄 알았던 골반도 뼈를 둘러싼 관절 막부터 덮고 있는 근육들까지 죄다 찢어져있었다. 내가 팔을 움직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지난 2달간 차츰차츰 회복되어 가면서 이제는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에서는 적어도 2주 이상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한국에 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좌절감이 교차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다시 이곳에서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슬기롭지 못한 병원생활

이른 아침부터 치료가 시작됐다. 뼈가 붙었으니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는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 후유증이 남았을 거라며 재활이 급선무라고 했다. 온몸을 주무르는 시원한 마사지 정도를 기대했던 나에게 재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을 선사했다.


사고 이후 뒤틀린 척추와 굳어버린 관절들을 꺾어대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고, 물리치료사는 조심조심 움직이던 관절을 사정없이 꺽어주었다. 하루 2시간, 우리 부부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괴성을 지르고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울었다.


빨간약과 후시딘을 바르는 게 전부였던 다리의 상처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심각했다. 시커멓게 변한 다리를 보면서도 단순히 멍이 심하게 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뼈 윗부분에 생긴 상처에 피가 통하지 않은 탓에 살이 곪아 피부괴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의사는 새살이 돋아야 피부이식을 할 수 있다며 두껍게 생긴 피딱지를 뜯어내고 썩은 부위의 살을 긁어냈다.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생살을 긁어 피를 내고 피부밑을 헤집는 치료가 반복되었다. 세포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취약도 없이 진행되는 시술을 나는 침대시트를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뒤늦게 찾아온 우울

하루 종일 이곳저곳 치료실에 불려 다니다 하루가 다 지나갔다. 고통스러운 치료가 끝나면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끼니도 거른채 잠이 들었다. 늦은 밤이면 한국 시간에 적응하지 못한 몸이 깨어났다. 그렇게 매일 밤 모두가 잠든 병실에서 불 꺼진 침대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생각했다.


다음 날 다시 시작될 치료 생각에 날이 밝는 게 두려웠다. 눈물은 말라버렸고 울음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뭔지 모를 감정상태로 넋을 놓는 시간이 길어졌고 초점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사이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멘탈은 무너지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우울증이 찾아오는 듯 했다.


남편과 나는 서서히 웃음을 잃어갔고 각자의 병실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서로가 힘들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지쳐있었다. 모든 것이 제공되는 병원에서 몸을 치료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감옥 없는 창살 속에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우리 마음이 쉴 수 있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우리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우리를 만나러 온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소식없이 행복하게 신혼여행을 즐기는 줄 알았던 우리의 사고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많이 놀라고 걱정스러워했다. 그런 우리를 보기위해 많은 이들이 머나먼 서울 병원까지 우릴 보기 위해 찾아와 주었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힘과 위로를 얻은 덕에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길고 버거웠던 2주의 치료를 견딜 수 있었다.


아무런 감정없이 메말라가던 나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와 촉촉한 물을 부어준 그들에게 말로 다 표현 못할 감사를 전한다. 그들의 사랑과 웃음과 포옹이 우리를 치유시켰고, 움직였으며, 살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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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그대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생애 최악의 생일이 될뻔한 생일을 살린 꽃다발과 케익 - 고마워요 나의 쌍둥이여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우리 이야기가 저렇게 동화 같이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우린 그저 우리가 살고 있던 일상으로 돌아왔을 뿐 모든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금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뿐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신혼집으로 돌아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우리의 소식을 듣고 놀란 지인들을 만나며, 매일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사고로 인해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에 모든 것이 느려지고, 약해지고, 작은 일도 버겁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씩 천천히 해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중이었지만 맘 편히 쉬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국 보험사에 연락해 병원비를 청구하고, 부산에서 병원치료를 받았고, 터키 변호사에게 보낼 국제재판서류를 떼기 위해 서울 외교부를 오가며 생전 처음 해보는 것들을 해내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가끔씩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거나 마음만큼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할 때면 속상하고 우울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머리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도 나만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며 나 자신을 다독여 다시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느리게 기어가는 느낌이 들 때마다 조급하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곁에서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보낸 6개월이라는 시간은 60년 같이 길고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냈다.


우리는 여전히 아프고, 싸우고, 울곤 한다. 그럼에도 함께 했던 그 시간들 덕에 우리는 좀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가까워졌다. 한장의 글로는 결코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나의 지난한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걸어와 준 나의 동반자에게 이 글을 빌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에게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문율이 깨어진 이후로 이전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두려워졌다. 사고 이후 생긴 크고 작은 트라우마들 때문에 아직까지 차를 타는 게 두렵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놀라며, 사이렌 소리에 마음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그날의 기억도 여전히 선명하다. 가끔 두려울 만큼 또렷해지기도 하고, 아득히 먼 옛날인 듯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날의 기억들이 언제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쉽사리 잊혀지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 이후의 삶들을 잊고 싶지 않다. 오히려 마음속에 고이고이 간직해두고 오랫동안 깊이 음미하고 싶다. 내게 많은 것을 알게 해 주고 가져다준 그 추억들이 내 인생에 한 편의 영화로 남을 것이니까.


나의 특별한 영화에 함께 출연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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