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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연 Apr 05. 2024

우리 집에 아기 있다. 아기가 있다고....



나의 직업은 강사다.


강사와 코미디언의 비슷한 점은 하루종일 내뱉어야 하는 말의 양을 밖에서 다 써버린 탓에 집에서는 고요히 자기 방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집에 얹혀살 때 힘들었다. 귀가하자마자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시키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특성상 자식의 안부가 궁금한 것이 당연하므로 이해하나 일일이 응대하다간 끝도 없이 질문이 이어지기 때문에 "저기, 나 아무 말 안 하고 싶은데 말 안 시키면 안 될까?" 하며 은근히 불효녀 같은 부탁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도 소용없다. 질문만 안 할 뿐이지 엄마의 혼잣말은 끝도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파에 붙어있던 무거운 엉덩이를 떼서 내방 침대로 옮겨 놓고 나서야 드디어 집에 온 것 같은 휴식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히키코모리 같은 증세는 밖에서도 비슷하다. 일할 때는 하염없이 떠들지만 점심시간에는 대체로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일하다 점심을 먹어 본 기억은 손에 꼽는다. 모두 떠난 빈 강의실에 남겨진 짐짝처럼 앉아 있거나 차로 옮겨간다. 그렇게 조용히 있어야 오후 시간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 불가피하게 다른 강사님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내향적이고 부끄러움까지 많은 나는 밥을 먹기 전부터 초조하다. 식당으로 걸어가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한다. 손가락을 하염없이 꼼질 거리면서 부디 어색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때 가장 좋은 이야깃거리는 역시 '아기'이야기이다.


애가 없는 40대 여성이 '아기'에 대해 질문하면 모두 합심하여 열심히 답을 해주시기 때문이다. 40대 딩크 여자가 드디어 임신 출산에 관심이 생겼구나 하고 조심스레 권해주시는 분들도 있다. 일단 내쪽에서 대화를 이끌어낸다. 


"어머, 아기가 너무 귀엽네요."

정말이지 마음에 없는 소리다. 나는 아기를 귀여워해 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러면 곧 이와 같은 대답을 듣게 된다.


"강사님은 애 없으시죠? 애 없는 것도 좋아요. 저는 일 끝나고 다시 집으로 출근이지만 강사님은 집에 가시면 맘대로 쉴 수 있잖아요."


오호라?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자녀로 살겠다는 나의 선택에 뿌듯함을 느낀다. 그래, 나는 아기가 없다. 집에 가면 그대로 침대로 직행해서 원하는 만큼 쉴 수 있다! 심지어 집에 안 가도 된다. 어디든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원하는 것을 해도 괜찮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 남편도 어엿한 성인이므로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한다.


그러다가 아랫배가 아파 용종도 떼고, 그 참에 폐경 증세를 상담하러 산부인과에 갔다가 임신인 것을 확인하고 태교 한번 한적 없이 37주간의 임신 시절을 보낸 후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난 뒤에도 강사의 삶은 비슷하다. 여전히 점심은 건너뛰고 혼자 보낸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 점심시간에 집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는 것이다.  




'우리 집에 아기 있다. 아기가 있다고....'


모두 떠나버린 빈 강의실에서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나는 100일 전부터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밖에 나와있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설렌다. 집에 아기가 있다. 집에 가면 아기가 있다니....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그까짓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뭐가 그토록 좋았던 건지. 집에 가서 내 아기를 끌어안고, 아기의 고소한 냄새를 킁킁 맡고, 젖을 먹이고, 곤히 잠든 아기를 구경하는 행복과는 하늘과 땅차이이다. 내 인생이 이렇게 충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오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복을 내리시나이까?

저는 이렇게까지 잘한 것이 없는뎁쇼?


그러고 보니 다른 워킹맘들은 집에 가면 아기 볼 생각에 좋았으면서 나한테는 아기가 없어서 좋겠다고 말한 것인가! 그 얘길 곧이곧대로 듣고 혼자 그토록 뿌듯했던 거냐고! 나 이것 참!




안녕하세요!

폐경인줄 알고 산부인과 갔다가 임신 출산까지 하게 된 딩크족 40대의 아기 키우는 이야기,

매주 금요일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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