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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펭귄 Jun 15. 2021

그래, 구겨져도 괜찮아

구겨짐에 대하여


  5년 동안 간병해 온 엄마를 반년 전 떠나보낸 뒤, 언니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 아무래도 너무 구겨져 버린 것 같아."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온 요즘, 가끔씩 지난 5년을 생각하노라면 그땐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았지 싶다. 언제 갑자기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2년 넘게 밤에 잠들지 못하는 괴로움, 병원비와 약값을 걱정하며 긴축재정을 펼치던 날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천천히 말라 시들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슬픔, 기껏해야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이 모든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어깨의 무거움.


  엄마의 투병이 시작되기 전의 내가 평범하고 빳빳한 종이와 같았다면, 삶의 무게를 과중하게 짊어지고 버텨내는 동안 내 모습은 조금씩 구겨지고 있었다. 하나하나 취업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취업하지 못한 건 나뿐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모은 것도 없었고, 맘 편히 외출을 하거나 여행을 갈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여행을 떠나 인증샷을 올릴 때 나는 엄마가 입원한 병원의 준중환자실 보호자 침대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석션기로 가래를 뽑아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다. 중년의 조선족 간병인이 대부분인 병동에서 20대 간병인은 내가 유일했다.


  엄마는 왜 하필 이런 역대급 전염병이 창궐하던 해에 세상을 떠난 걸까. 엄마가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5일의 시간 동안 나는 1인실에 격리된 채 홀로 엄마의 임종을 지켰다.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이 없어 언니가 가져다준 귤과 요구르트만 먹으며 5일을 보냈다. 내가 사랑했던 엄마의, 신체들이 내 눈앞에서 하나씩 기능을 상실할 때마다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마스크는 늘 마를 날 없이 축축했다. 뇌파 검사실에 갔다가 돌아온 엄마에게 생체반응 기계를 연결했을 때 아무런 신호도 뜨지 않자, 4개월 동안 함께했던 간호사 선생님들은 침묵했다. 날 남겨둔 채 모두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고 엄마의 등에 손을 넣어 마지막 온기를 느끼며 울었다. 이제 나에게는 엄마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누군가 주먹으로 콱 움켜쥔 것처럼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장례를 치른 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날들을 보냈다. 밀린 청소를 하며 엄마의 흔적들을 떠나보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을 만났다. 잠들지 못한 지난날들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하루에 열두 시간씩 잠을 잤다.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길을 걷다 우연히 하늘이 너무 파래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제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깨달아도 믿고 싶지 않아서, 깨닫고 깨닫고 또 깨달을 때마다 매번 무뎌지지 않고 아팠다.   

  1인실에서의 마지막 5일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죽어가던 엄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언제나 묵묵하고 성실해서 누구에게 미움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나의 엄마는 마지막까지 강하고 용기 있게 싸웠고, 우리 걱정만 하다가 떠났다.


  엄마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5년 동안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엄마에게 주었다. 내 시간과 진로, 체력, 미래, 재정까지도. 맹렬했던 시간만큼 허탈함은 컸다. 엄마가 떠난 후 한동안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무서웠다. 엄마가 없이 살아가야 할 시간도, 언젠가 마주하게 될 죽음도 두려워서 제발 내일 당장 재림의 날이 올 순 없을까 하고 빌었다.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은데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 삶은 하염없이 구겨졌고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매일같이 나를 괴롭혔다. 산다는 게 이렇게 버겁고 두려운 일이라는 걸 뼈에 사무치도록 알아버린 게 억울했다. 아직은 몰라도 됐던 건데, 나는 이제 고작 스물여덟 살인데.

  구겨지기 전의 내가 그리웠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예전의 사진을 보면 담즙처럼 쓴 마음이 치밀었다. 지금도 저때처럼 아무것도 몰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겨진 내가 이제는 펴지기 어려울 것 같아 막막했다. 나는 구겨진 채로 하염없이 누워 있었다. 오래오래.




  엄마가 떠난 뒤로 눈물이 많아졌다. 모든 노래 가사가 엄마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리움에 젖어 사는 동안 타인을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라났다. 소심한 성격이라 남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먼저 좀처럼 다가가지 못했는데 곤경에 처한 이들을 만나게 되면 엄마 생각이 나서 선뜻 다가가게 되었다.


  엄마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봄날이었다. 마지막 케이크를 픽업 보내고 퇴근을 하려던 차에 손님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000님 맞으시죠? 묻는 내 말에 손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어으으,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로 답했다. 순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고 잠깐 생각하다 이내 깨달았다. 아, 귀가 들리지 않는 분이시구나.

  모든 상담이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이루어지기에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손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는 데다 손님이 농인인 경우는 예상한 적이 없어서 얼떨떨한 상태로 케이크를 건네드렸다. 그러고 나서는 손님이 떠나고 난 뒤 오래도록 자책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나 우리의 눈은 분명 마주쳤고,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던 내 눈빛이 행여 비수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지는 않았을까. 상처가 된 것은 아닐까. 그게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눈으로 그토록 티를 냈을까. 우리의 만남은 순간이었으나 자책은 길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을까, 그녀가 재주문을 위해 다시 연락을 하고 예약을 했다. 다시 뵐 수 있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저번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떻게 그 손님을 맞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예약 당일, 평소보다 케이크 작업을 일찍 끝내고 작업대에 앉아 유튜브를 켰다. 오직 그 손님만을 위한 수화를 연습할 참이었다. 육성으로 이 마음을 전할 수 없다 해도 그렇게나마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공방 문이 열렸다. 케이크를 들고 문 밖으로 나갔다. 보통은 픽업 때 마스크를 쓰지만 이날은 특별히 마스크를 벗고 그녀를 맞이했다. 케이크를 건네고 돌아서는 짧은 시간 사이, 환하게 웃으며 왼손등에 오른손 날을 두 번 톡톡 두드렸다. 많이 놀란 듯 눈이 커진 손님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도 왼손등에 오른손 날을 두 번 두드려 화답했다. '감사합니다'라는 뜻이다.

  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입고 공방 문 앞에 선 채로 기쁘게 멀어지는 손님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뜨끈한 무언가가 물에 녹아내린 입욕제처럼 빠르게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루는 엄마와 에스컬레이터를 탈 일이 있었다. 엄마는 좀처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지 못했다. 팔과 다리에 힘이 없으니 넘어질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내가 늘 아무렇지도 않게 타던 에스컬레이터가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또 다른 어느 날은 마을버스에 타기 힘들어 오랜 시간이 걸렸던 엄마를 기사님과 승객들 모두가 천천히 기다려주었고, 엄마가 들것에 실려 구급차에 실려갈 때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주민들이 얼른 내려서 순서를 양보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없이 고된 나날들 속에서도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우리를 살게 했다.

  5년의 아픔을 겪고 엄마를 아프게 떠나보내는 모든 진통의 과정을 애초에 겪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삶이 이렇게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구겨진 적 없는 종이처럼 뻣뻣하게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갔을 터다. 진통하는 동안 나는 분명 구겨졌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고, 구겨진 나는 초라했고, 구겨지는 동안 지독히도 아팠다. 그러나 구겨지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삶의 다양한 단면들을 마주했다. 똑바로 펴져 있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음지와 양지들, 그리고 발견하지 못했던 인생의 그늘들. 삶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그 시간들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조금 더 공감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내가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스락, 하고 구겨진 마음이 조금 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달라진 건 없다. 나는 그대로 구겨진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스물일곱 살에 엄마를 잃었고, 꽃다운 20대의 절반을 간병하며 보냈고, 그 덕에 남들이 취업할 때 취업하지 못했고, 이력서에 쓸 만한 그 흔한 경력 한 줄 없으며, 가진 것 없는 내일모레 서른이다.

  그러나 엄마가 떠났다고 내 삶은 끝난 게 아니다. 엄마를 잃었다고 내 삶은 잘못된 게 아니다. 남들과 같지 않다고 해서 내 삶은 틀리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한 가장 소중했던 5년 동안 나는 남들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삶의 교훈과, 타인의 그늘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긍휼한 마음을 얻었다.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도 살 수 없는 진심을.

  내 구겨진 결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때로는 마음을 담은 진심을 건네는 것. 구겨진 삶의 이면에 숨겨진 그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내 아픔으로 그들의 아픔을 더듬고- 엄마에게 받은 사랑으로 이제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 천국에서 다시 엄마를 만날 때 천상병 시인의 <귀천> 마지막 구절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런 내가 될 수만 있다면, 이제는 굳이 펴지지 않아도 좋아.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자, 구겨진 삶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뮤지컬 <위키드>의 마지막 공연을 보고 왔다. 절친한 친구가 된 엘파바와 글린다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 'For Good'을 듣다가 엄마가 많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는 거라

사람들은 운명을 찾아내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겨서

힘을 준대 성장할 수 있도록

어제와 다른 나의 인생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널 만났기에


태양에게 이끌리는 작은 혜성처럼

바위를 만나 휘도는 시냇물처럼

너라는 중력이 손을 내밀어

난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없다 하여도

너는 이미 심장의 일부가 되어

나 숨 쉬는 매 순간 항상 곁에서

힘을 내가 미소 지어줄 테지

내일을 알 수 없는 내 삶이

너의 존재로 이렇게 따스해졌어


머나먼 바다로 떠날 항구의 배처럼

바람에 실려 날아갈 씨앗들처럼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난 너로 인하여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


뮤지컬 위키드(Wicked) - 'For Good'





이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엄마에게.


엄마가 내 엄마여서 내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어.

우리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귀하고 행복했어.

우리가 이 땅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다 해도

내 심장의 일부가 되어 내 곁에 있다는 걸 알아.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사랑한 엄마의

강인하고 놀라웠던 사랑을 기억하면서

두려운 내일이지만 씩씩하게 걸어갈 거야.


엄마, 이제는 내가 내일로 나아갈 시간이야.

고마워, 날 정말 많이 사랑해 줘서

내 마음에 그 사랑을 심어놓고 가 줘서

그로 인해 내 삶을 달라지게 해 줘서.

더 나은 내가 되게 해 줘서 :)


덕분에 구겨진 내가

썩 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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