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붙은 포스터가 흔하던 때였다. 불조심과 간첩 신고, 그리고 나라 사랑 등의 내용이었다. 저출산을 장려하는 내용도 있었는데, 문구는 '둘도 많다'였다. 출산을 장려하는 요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1980년대에 충실하게 포스터의 충고를 새겨들은 어머니는 자식을 딱 둘만 낳았지만 다른 엄마들은 달랐다. 동네에 네다섯 명의 아이들이 있는 집이 흔했고 마을마다 아이들이 노인보다 많았다.
국민학교 한 반의 인원은 60여 명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편을 나눠 놀이를 했는데, 여학생들은 작고 둥근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하거나 검정 고무줄을 넘어 다녔고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전쟁놀이를 했다. 이 전쟁은 보통 때는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는 식이었는데 새해가 시작되면 그 방법이 달라졌다. 아이들의 손에는 막대기 대신 철사에 매달린 깡통이 들렸다. 마을 아이들은 단체로 모여 깡통 돌리는 연습을 했다. 아랫마을 아이들과 맞붙는, 불깡통을 멀리 던지는 대결 때문이었다.
음력 정월 첫 쥐 날, 상자일(上子日)에 어른들은 논두렁에 불을 놓았다. 쥐불놀이였다. 불을 붙이는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어른들에게는 해충과 쥐를 쫒는 것이 목적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공식적으로 불장난이 허락된 날이기에 불타는 논두렁은 롯데월드 못지않은 놀이터였다.
논의 가운데에는 나무를 쌓아둔 곳이 있었는데, 안쪽에는 굵은 나무를 세워서 피라미드 형태로 만들어두고 그 바깥에는 긴 대나무를 피라미드 주위로 뱅 돌려 감싸듯이 비끄러맸다. 달집이었다.
생채기 하나 없는 달이 산 위로 오르면 마을에서 제일 어른이 땅에 맞닿은 달집 끄트머리에 불붙은 짚을 던졌다. 겉에 세운 대나무 잎에 먼저 불이 붙었고 금세 안쪽 장작에서 뻘건 불길이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처녀귀신 눈동자처럼 이글거렸다.
불길은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사방에 불씨를 날렸는데, 수십만의 반딧불이 같았고 빛나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바람에 불길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열기를 뿜어낼 때마다 아이들은 파도를 피해 달아나듯이 달집과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슬슬 중학생들이 깡통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깡통 위쪽 중간에 두 개의 구멍을 뚫고 한 구멍마다 철사를 넣고 돌돌 말아 철사가 빠지지 않게 만들었는데, 긴 철사는 손잡이가 되어 곧 윙윙 소리를 내며 깡통을 회전시킬 것이었다. 바깥선으로만 본다면 바람 빠진 열기구 같았다. 깡통 몸통과 밑바닥은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구멍들은 바깥에서 안으로 뚫려서 깡통의 안쪽으로 물방울 튀는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손에 든 깡통의 종류는 다양했다. 중학생들은 주로 페인트 통이었고 어떤 아이는 읍내 중국집에서 얻어온 케첩 깡통이었고 나는 그보다 작은 분유통을 손에 들었다.
자정이 넘어서자 어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불조심과 빠른 귀가를 당부했는데, 강압적이지는 않았고 대보름날의 공식적인 불장난을 허용하는 눈치였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병사들이 거의 다 탄 달집의 잔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병사들의 손에는 다윗의 물매 돌처럼 철사줄이 걸린 깡통 하나씩이 들려있었다. 깡통에 불을 붙인 아이들이 하나둘씩 손목과 팔을 이용해서 깡통을 돌리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노란 용이 쉭쉭 혀를 날름거리며 불을 뿜어대는 듯했다. 한 자리를 맴도는 용은 둥근 불 수레바퀴를 만들었다. 큰 깡통은 더 큰 소리와 불길로 큰 바퀴를 그렸고 작은 분유통은 작지만 속도감에서는 단연 최고였다.
이제 마지막, 연습까지 했던 장면이 남아있었다. 불깡통을 높이 던져 올려 깡통 속의 불씨를 검은 하늘에 퍼뜨리는 일이었다.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불똥을 보내면 승리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최고로 깡통의 회전을 빠르게 한 다음 불깡통의 밑동이 하늘을 향할 때 철사 잡은 손을 놓았다. 깡통 속에서 불타고 있던 나무 조각들이 허공에 쏟아졌다. 노란 불씨가 사방으로 날았다. 목을 젖힌 아이들의 입이 일제히 벌어졌다. 하지만 둥근달을 향해 위로 오르던 불꽃들은 금세 사라졌다. 아이들이 수탉처럼 소리를 질렀고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밤에 마을의 불빛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