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느른*유키 구라모토*죽산삼거리*보리밭
결혼을 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유리빌딩이 밤이 되면 낮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서울에 15년을 살았다.
지금 나는 수백 개의 초록색을 가진 깊고 푸른 섬 제주에 9년째 살고 있다.
화려한 서울이나, 깊고 푸른 제주에 비하면 한참 초라한 시골인데,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찾아가는 고향의 풍경이 어느 순간부터 예쁘고 애틋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들판의 광활함. 뜨거운 햇빛 끝에 느껴지는 들판의 평화로움, 벼 끝에 맺힌 이슬방울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초록은 다 같은 초록인줄 알았으나
콩잎의 초록과 벼 이삭의 초록과 옥수수의 초록이 다르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심히 봤던 회색빛 시멘트 벽엔 유리가루가 들어있는지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 부서진 슬라브 지붕 위 호박잎도 오브제처럼 보이는 예쁜 시골이구나.... 그러나 여전히 내 감상에 확신이 없었다. 아빠도 엄마도 동네사람 누구도 그걸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일테지. 내 눈에만 예쁜 건가 싶었는데, 그때 즈음 평야의 낭만과 정서를 화면에 담아낸 이가 있었으니 유튜브 채널 <오느른>이다.
MBC소속 PD가 도시를 벗어나 살 집을 찾다가 김제까지 내려와 김제 죽산에 폐가를 사고 본인이 보고 만지는 하루를 방송국 카메라로 담고 방송국 마이크로 소리를 모았다.
카메라 빨 제대로 받은 김제는 충분히 예쁜 내 고장을 넘어 너무 매력적이었다.
평소에 유튜브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업로드 시간을 기다렸다 챙겨보는 채널이 되었다.
여러 영상 속에 동트는 새벽, 한때는 흥했고 지금은 쇠한 죽산 삼거리에 피아노 한대가 놓이고, 유키 구라모토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영상이 있었다.
동틀 무렵 죽산삼거리에 이어 석양의 보리밭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 시골길 라이브 콘서트.
유튜브 <오느른>의 엄청난 기획력. 기획만으로도 기발하고 대단한데, 그 연주자가 유키 구라모토 라니. 실로 엄청난 스케일이다.
지상파도 아닌 유튜브 채널이 이런 걸 해낸다고? (물론 방송국 님들이 해낸 일은 맞습니다만)
얼마 만에 그 길에 사람들이 머무르고, 복작거렸을까.
처음엔 그저 그 시골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머물고 연주를 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해서 영상을 보고 있다가,
그 새벽의 기운과 저녁의 평화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보지 않았어도 내가 거기 없었어도, 나 거기 함께 있는 것 같은 그런 설렘이 느껴졌다.
감동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한동안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이 감동의 유효기간과 감동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시골길 위에 황홀한 피아노 선율.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뭉클한 마음이 들고 눈에 눈물이 어리거나 코끝에 찡함이 맺혔다.
거장의 힘인지, 피아노의 힘인지, 영상의 힘인지, 내 무너진 감정선인지 알 길은 없었다. 현실인데 초현실 같아 감동이 밀려오는 듯했다.
메마른 나를 울게 하는 영상을 보다가 어떤 용기 같은 게 생겼다. 내 고향의 풍경을 그려보자.
스케치북을 샀다.
* 종이:KHADI PAPERS
*영상 참조 및 출처 : 유튜브 <오느른>
https://youtu.be/YfVGtJY1i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