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를 잘하고 싶어 배운 수채화
그렇게 스케치북을 한 권 샀고 김제의 풍경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일단 나에게 가장 큰 감명을 준 오느른의 풍경들을 수채화로 그렸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독자가 있다면) 내가 원래 그림을 그리던 사람인지 궁금하려나.
나는 2016년 12월. 만 21년을 근무한 은행을 퇴직했다.
퇴직 후에 뭘 하고 놀아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관심 가는 것도 별로 없고, 할 수 있겠다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친한 언니와 함께 근처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교육과정을 훑어봤다.
나는 캘리그래피를 해보고 싶었고, 언니는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캘리그래피 초급과 드로잉 기초 과정에 같이 등록했다.
캘리그래피를 배우다 보니, 간단한 일러스트나 수채화를 같이 배워두는 게 캘리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다음 학기에는 드로잉 기초과정과 수채화 기초과정을 수강했다. 그렇게 캘리그래피를 잘하고 싶어서 시작한 수채화였다.
수채화가 익숙해지면 캘리그래피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계속 좋다면, 수채화를 넘어 유화나 아크릴화를 그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채화에 정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레벨 업, 나는 어째서 수채화를 아크릴이나 유화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을까.
초등학교에서 다루는 미술의 교육과정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 1학년에 맨 처음 크레파스나 색연필로 그림을 시작하고, 그 후에 수채화를 배우고... 그다음엔, 포스터물감을 배우고,
그 이상의 미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학원을 통해서 유화나 아크릴을 배우니까?
사실 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림을 그려보라고는 했지만 어떻게 그리는지는 배운 기억이 없다.
수업시간에 물감 풀어놓고, 헤맸던 기억은 아련하게 남아있다. 잘 그리는 몇몇 친구들은 선생님께 칭찬도 받고 그림이 교실이나 복도에 전시가 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내 그림은 너무 엉망이었던 기억이 크게 남아 이 생에 그림을 배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미술은 아직 손이 야무지지 못하고 생각이 영글지 않은 애들한테 잘한다 못한다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어른이 되어 미술을 배우면서 깨닫고 있다.
수채화의 인연은 캘리그래피 때문에 시작되었고,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6년째 매주 작업실에서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가끔은 카톡 프사에 올려놓은 그림을 보고 ‘원래 그림을 배웠었느냐’ 고 묻는 지인분들이 있다.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나도 내가 그림을 그릴 생각은 못해봤는데
해보니까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림은 그리냐 안 그리냐의 차이다.
누구나 그리기 시작하면 다 작품이 된다.
진짜 누구나 다 그릴 수 있다.
‘그림을 배우고 싶었는데 ‘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다면 꼭 배워보라고 권하고 싶다.
진짜로!!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없다.
그리기 시작하면 다 잘 그린다. 그리고 자기만의 그림세계가 있다.
그 어떤 일보다 성취감이 높은 배움 중에 하나이다.
내가 본 풍경이나 기억에 남는 순간을 그리는 지금이 좋다.
이 풍경은 유튜브로 화면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그림은 더 따뜻한 느낌이 든다.
그림을 그리면 인생이 2% 더, 아름다워진다.
아니 200% 더 아름답게 채울 수 있다.
유키 구라모토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유키 구라모토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물리학자 출신이었다. 피아노 전공자가 아니지만 20대에 피아노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해본 것 같다고 말하는 물리학자 출신 음악가이자 연주자.
70대 초반인 아직도 현업으로 작곡과 연주를 하고 지금도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 80살이 되면 더 잘하게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거장.
나도 꾸준히 그리다 보면 80살 즘에는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꾸준히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종이 : KHADI PAPERS(made in in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