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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Oct 17. 2022

엉덩이를 붙이고 프리라이팅

프리라이팅을 통해 나를 좀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글쓰는 엄마’를 연재해야겠다고 맘먹은 그때를 떠올린다. ‘저도 글을 쓰고 싶어요.’ 간절함이 전해졌다. 어떤 글을 쓰고 싶으냐, 하는 것은 그다음이었다. 에세이, 기사, 소설, 인터뷰, 그 외에도 분류하자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몇십 가지를 나열할 수는 있다. 차차 찾아질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어떤 글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어떤 글을 꾸준하게 쓰게 될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손이 적절한 글의 형태로 데려갈 수도 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보면, 글을 쓰고 싶다는 간절함은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로는 해소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사람 안에 존재한다. 글이 아닌 그림이나 음악, 기타 다른 예술로도 표현이 가능할 테다. 그중에 하나가 글이라면, 그것은 접근이 쉽기 때문이다. 큰돈이나 특별한 공간이 필요치 않다. 거창한 준비물도 필요 없다. 노트북이 있으면 좀 더 나을까 싶지만, 손으로 쓰는 묵직한 글이 더 나을 때가 많다. 


뭐든 써보라고 말한다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까. 연필이나 볼펜을 잡고 ‘분신사바’를 하듯 아무 생각도 없이 손이 움직이는 대로 내 몸과 마음을 그리로 집중한다면, 코웃음을 치면서 팔짱을 낀 채 눈을 부라릴 것만 같다. 무섭지만, 그래도 작은 목소리로 말해야겠다. ‘프리라이팅’이라는 글쓰기도 있다고. 말 그대로 자유 글쓰기. 처음부터 생각을 설계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써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맞는지, 단어가 적절한지, 문장 구조는 자연스러운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일단 첫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면 그다음부터는 의식의 흐름에 몸을 내맡겨 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쓰기 싫다’도 괜찮다. 마음이란 청개구리 심보처럼 글을 쓰자고 하면, 지독히도 글이 쓰기 싫어진다. 


내가 왜 글을 쓰려고 하지, 의구심으로 써본다. 평소의 생각들이 줄줄이 이어 달려 나올 것이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딱 멈춘다. 생각 밖의 것들이 걸려 나올 참이다. 뜸을 들이지만 곧이어 나올 테니, 엉덩이만 붙이면 된다. 멈추는 것이 두려워 화장실에 가는 것만 피하면 된다. 자리를 피하지 말고 그대로 기다리면 자신도 모르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신없이, 시간의 흐름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한다. 몰입이 된 것이다. 여기서 더 깊은 몰입에 들어가면 ‘나’라는 것도 잊고 쓰고 있는 행위만 남는다. 특별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쓰면 체험할 수 있는 평범한 광경이다. ‘나’가 사라지고, 글만 남는 것이다.  


시간을 정해도 좋고, 나 같은 경우는 딱히 시간을 재지 않는다. 글이 알아서 시작하고 끝날 시간까지 정한다. 모든 주권을 글에게 떠넘기고, 내 몸은 그저 따라가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그저 따라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이성이란 걸 부여잡고, 써도 될까 말까 갸우뚱하느라 내맡기지 못한다. 괜찮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도 아니다. 이전의 습관들이 내 몸과 내 생각, 내 의식의 흐름까지 통제하려고 손을 쓰려고 하는 것뿐이다. 습관일 뿐이다.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엉덩이 붙이기에 성공했다면, 그걸로 됐다. 글은 써졌을 것이다. 그래, 한번 읽어볼까. 예상치도 못한 글의 내용에 볼이 빨개진다. 누가 보면 큰일 날 것만 같다. 날것의 글들은 때로는 도덕이나 세상의 윤리 같은 것은 개의치 않을 테니. 구태여 손 볼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내보일 글이라면 모르겠지만, 프리라이팅은 대부분 한 번의 글쓰기로 끝난다. 그 과정을 통과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충분히 얻었다.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프리라이팅을 한 당사자만 말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다. 


프리라이팅을 통해 나의 거짓된 생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평상시에 늘 머릿속에 채우고 다니던 ‘나의 생각’이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남의 생각임을 알아챘다. 사회적인 인간관계나 인정 욕구로 외부의 생각들을 마치 내 것인 양 믿고 떠들었다. 때로는 가슴에 걸렸던 감정을 파헤친 적 있다. 글을 쓰면서 눈물이 고였다. 눈물 방울이 테이블에 뚝뚝 떨어졌다. 휴지를 들고 눈물을 훔쳐야 했다. 카페였지만, 다행히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채로 프리라이팅을 끝냈다. 홀가분해졌다. ‘감정’이란 게 흠뻑 몸으로 스며들어 느껴주니 오히려 감정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했다. 


프리라이팅은 내 안의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작업과 비슷했다. 작은 우물가 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보이지 않는다. 저 안 깊숙이 두레박을 내려야만 간신히 물을 건져 올린다. 얼마나 많은 물이 있는지 가늠할 수도 없다. 퍼도 퍼도 끝은 없다. 프리라이팅도 매번 마찬가지였다. 매일 써도, 매일 다른 글들이 건져 올려졌다. 오늘은 이랬으니, 내일은 이렇겠지. 예상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내가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 모른다’라는 문장이 자꾸 되뇌어진다. 쓰기 전에는 ‘못 쓰는 사람’이었다. 글을 쓰리라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딴 세상인 것만 같다. 외계의 행성처럼 나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보이지도 않는 세계.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글 탐험을 하는 중이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고. 하지만 그 중심에는 프리라이팅이 버티고 있다. 깊은 우물 속의 무한한 가능성은 두레박을 사용하지 않으면 절대 발견될 수 없다. 


나는 오늘도 프라라이팅으로 글을 연다. 익숙할 법도 한데, 새롭게 발견되는 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전율이 인다. 카페에는 삼삼오오 차 한 잔과 이야기꽃을 즐기러 온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람들이 소리 없는 배경 그림이 되어 준다.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카페의 음악이 아니다.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 귓가에 남는다. 그리고 흰 바탕에 검은 글자들이 공백을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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