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Oct 20. 2022

나에게 질문하고, 내가 답한다

사춘기 아들이 말문을 닫았어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맘카페에 ‘사춘기 아들이 말문을 닫았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 자식을 키운다면 사춘기의 자식을 거치게 되고, 그 개인적인 경험들이 댓글이 되어 꽤나 많은 공감대를 이루었다. 나름의 솔루션과 시간이 약이다, 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답변까지 다양했다. 질문을 한 당사자는 다소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나만 고민하는 문제는 아니구나.’ 뒤돌아서면 위안과는 다르게 요동치는 마음이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밥 먹을래? 간단한 질문에도 똑 부러지게 답하지 않는 사춘기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만다. 공감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상황은 더욱 악화될 조짐이다. 집안에서는 나만 고통스러울 뿐이지만, 학교에서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말문을 닫은 사춘기 아들에게 물어서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한다. 선생님이 먼저 부모를 찾지만, 아들의 입장을 확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점점 무거워지고 더 이상 외부로 아들의 문제를 꺼내놓기 어려운 수준까지 이른다. 


개인적인 고민을 외부에 털어놓은 적 있다. 가까운 친구에게 또는 불특정 다수가 보는 맘카페를 이용하기도 한다. 현실적인 답안에 가슴이 뻥 뚫리기도 하고, 조언대로 실행해보기도 한다. 잘 해결될 때도 있지만 결국은 고민의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전문가, 책, 가까운 지인, 온라인 카페 등 외부에서 답을 찾았다. 


그럼에도 문제가 반복적인 패턴으로 일어난다면, 자신에게 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혼자 끙끙대며 생각해 보았다고 항변할 것이다. 생각은 충분히 해봤고, 고심도 누구보다 많이 했다. 머릿속의 생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지만, 깊이 침착하지는 못한다. 생각의 한계. 돌고 도는 반복적인 생각을 빈 여백에 글로 써보자. 거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난 왜 사춘기 아들이 힘들까? 그리 살갑게 굴던 아들이 왜 갑자기 말문을 닫았을까? 난 왜 이렇게 공허함이 밀려올까? 아들과 영영 대화를 못하게 되면 우리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푸념과 불만, 불안과 걱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진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미칠 것 같은 분노는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다다른다. 이러다가 아들에게 손찌검을 할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긴 싫다. 꾹 다시 한번 참아본다. 막연했던 불안감의 실체들이 단어로, 문장으로, 글로 쓰여질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더 지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공허함만 더욱 키우는 것 같을 수 있다. 


그 깊은 공허감에 또 하나의 질문을 투척해보자. 아들과 멀어지는 관계가 왜 불안할까? 아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게 난 왜 안 될까? 그동안 아들에게 기대어 살았을까? 아들의 엄마가 아닌, ‘나’로서 이 시간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질문의 모양도, 색깔도, 질감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질문이든,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허용해보자. 여태까지 나에게 질문해본 적 있던가! 질문할 수 없었다. 내가 한없이 미진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질문을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막막함에 스스로 질문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열했다. 내가 나에게 질문하고, 답변도 내가 한다. 자문자답. 생각으로만 나열되던 문제들이 글이 되어 나타날 때는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비로소 나의 문제를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춘기 아들과 엄마 이 둘의 관계가 글 속에서 펼쳐지고 영화의 장면처럼 묘사가 된다. 사춘기 아들의 입장에서도 글을 쓰게 된다. 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아들이 되어 느껴보니, 엄마의 입장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것만 같다. 기다려주지 못하고, 늘 조급하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그제야 보인다. 더불어 나의 사춘기 시절까지, 거슬러 간다. 사춘기 아들을 통해서 내가 풀어내지 못한 사춘기의 내 문제가 보였다. 



이전 09화 엉덩이를 붙이고 프리라이팅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