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신부님과 아이들의 공통점
환한 웃음. 차를 마시고 가라는 말. 큰 건물의 저 끝에서 이 끝까지 걸어갈 때 까지 나를 따라오는 발. 원래대로라면 나는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앞을 보고 걸었겠지만, 이번에는 뭔가 당당했었다. 아예 저 큰 건물 안에 내가 들어갔다 나와도 상관 없을 것 같은 당당함. 팔달로 예술회관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리니 전주에도 신천지 건물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그 당당함은 뭐랄까. 내가 저기 들어가서 차도 달라고 하고. 잠깐 2시간동안 노트북 좀 펴고 글 좀 쓰겠다고 하고. 커피도 있으면 좀 달여달라고 부탁하고. 스윽 나와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당당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걸어가면서, 다만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이번에는 살필 수 있었다. 환하게 밝은 웃음이었다. 차라리 삭막하고 무표정한 사람들보다는 나을 것 같다고 꿈뻑 속아 넘어가기 좋은 얼굴. 곰곰히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생각을 더 들여다 할 수 있었다. 결론은, 그 표정은 잔혹함의 표정이다. 따라서 더 걸어가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LP카페에서 드립커피를 시키길 잘했다. 잔혹함을 더하지 않았다.
늘 웃어야 하는 것. 늘 밝게 대답해야 하는 것. 늘 앞에 있는 사람을 모셔야 하는 것. 진정성을 잃어버리는 것. 구수한 욕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 늘 함께 있는 나를 상대방보다 등한시 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잔혹함이다. 그러나 이를 잔혹함이라 명명하기가 이토록 어려웠던 것은. 잔혹함 없이 잔혹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냐는 한탄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맞닿아 있을 것이다. 잔혹한 세상과. 잔혹한 내면을 계속 쌓는 것은. 그래서 늘 웃어야 하는 게 정말 중요할 수도 있고. 늘 밝게 대답하는 게 내게 이익이 될 수 있고. 늘 앞에 있는 사람을 모셔야 돌파할 수 있는 경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했을 때, 내가 나에게 잔혹하기를 요구했던 사람들을 손쉽게 용서하기가 쉬워질 뻔 한다. 어쩌면 이렇게 방향을 잃어버릴 뻔 할 때.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다시 정방향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요즘은 그다지 이 세상이 잔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자면, 아. 내가 늘 웃는다면. 늘 밝게 대답한다면. 늘 앞에 있는 사람을 모신다면 굶어죽을 일은, 정말로 전혀 없겠구나. 그런데 그게 꼭 내가 싫어하기까지 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고생한 엄마와 아빠에게만. 삼촌에게만. 좋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여행지에서 만났을 때 기꺼이 음식과 시간을 내주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옮겨 다니며 살기만 해도, 세상은 전혀 잔혹하지 않겠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내가 많은 것을 예비하지 않아도. 적어도 내가 먹고 자고 사는 것에 관해서만큼은 그날 하루하루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물론 이러려면 정말 '자아'라는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겠다고.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나는 평생을 바쳐서 내가 애정을 갖고 사람들을 도울만한 무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그것에 나의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한다면. 이 세상은 잔혹하지 않다. 따라서 내게 잔혹함은 필요 없다. 나를 정말로 사랑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조금의 거슬림 정도는 그냥 지나가게 냅두고 푹 주저앉아도 된다는 감각. 그들의 남겨진 사랑을 다 거덜내는 게 적어도 내 삶의 큰 이유 중에 하나겠다 라는 어떤 관대함이 내 안에 생겼다.
왜냐하면. 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고. 만나고 싶은 세상도 많지만. 사실 1월의 하루하루의 일상이 나는 그 자체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보일러 없는 집에서 이불과 몸 사이에 가둬진 온기만으로 잠을 자는 것도. 본인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남아서 가져온 음식인데, 내가 생각났다며, 나를 집에 데리고 가서 막 박스에 담아서 주신 일회용 음식들을 한끼 한끼 먹으며 해치우는 것도. 오서산 풍경을 굳이 바라보겠다고 추운 밖에서 컵라면을 먹고, 귀신같이 밥솥에 남아있던 밥을 가져와 밥을 말아먹으며 배불러 하는 것도. 이웃 아주머니 아저씨가 미안해서 부르는 저녁식사에서 진짜 맛있는 무조림과 함께 밥을 먹는 것도. 매일매일 교회의 공간에서 언어공부하고. 유투브 영상찍고. 신기하게 그 순간들이 지금 내가 겪은 어느 순간보다도 행복하다. 따라서 내가 이 행복의 감각을 잃지만 않는다면. 내가 앞으로 돈을 많이 벌건. 내가 앞으로 어디서 공부를 하게 되건. 이 세상에서 걱정할 것은 내 삶의 목적과 여정의 문제이지. 생사의 문제가 아니구나. 하다못해 신천지 신도같은 사람들이 나를 꾀내려고 뭐라도 줄 일도 반드시 살면서 있을텐데. 내가 부족하다고 걱정할게 정말로 전혀 없구나.
순례길을 걸을 때. 어느 카톨릭 지부에서 운영하는 공립알베르게에 갔다. 그 때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님을 만났다. 그 신부님은 나의 눈을 또렷이 바라보면서. 자기가 여행했던 이야기를 좀 해주다가. 떠나면서 나의 눈을 다시 또렷이 바라보면서 한 마디 말을 해주었다. "enjoy life". 그 때는 그 말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신부님의 삶은 enjoy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가장 enjoy와 거리가 먼 삶은 그 때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한국에 가서 어떻게 살지를 계속 걱정하고 계획하고 있던 나의 삶이었다. 세상이 잔혹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면. 내 안의 잔혹함을 어느 순간에나 거둬낼 수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잔혹함을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다면. 이미 내 인생의 전부를 채우고도 남을 사랑의 크기를 알게 된다면. 정말 어느 순간이든 그 안으로 들어가 enjoy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걱정은 오늘까지로 하면서.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면서. 조금은 마찰이 있을 거고 들어가기 힘겨울 수도 있으나 결국은 그 속으로 들어가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끝까지 들어가게 하는 힘은 바로 관대함이고. 바깥으로 나를 밀어내는 힘은 잔혹함이다.
아이돌봄센터에서 2년여 공익근무를 하며 아이들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얼마 전, '다온'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저 다온이에요" 하는 말에 내 목소리의 톤이 흠껏 올라갔다. 신남이 천장까지 가득 닿은 목소리였다. 자기를 보고싶었냐고 물어봐서 "당연히 다온이가 보고싶었지." 라고 말했더니. "초록샘 잘 지내셨어요?" 라고 물어봐서 "그럼 엄청 잘 지내고 있지." 라고 말하니. "그럼 저 보고싶은 만큼만 잘 못 지내셨겠네요?" 라고 말해서 팔짝 뛰고 웃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난 "야 너 진짜 머리가 좋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라고 말했지만. 다온이의 머리가 좋은 지점은 누군가를 보고 싶어함을 행복의 마이너스로 바라본 사실이고. 더 정말 총명한 것은 잘 지낸다는 나의 말에 자기자신을 보면 더 행복해질 수 있음을 일단 믿어버리는, 그런 아이의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이다. 순간적인 재치와 머리굴림이 없는 다른 아이들도 그러한 방면에서는 모두 총명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잔혹함이 쌓이고 쌓여. 당연했던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더 열심히 살고 싶다. 아니, 더 열심히 놀고 싶다. 상담선생님은 치료의 목적을 더 잘 놀 수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애들은 정말이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논다. 저 애들 같이만 살면 누구보다 열심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내가 아이들처럼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된 내가 아이들 같은 총명함을 추구할 수는 있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마음 속의 잔혹함을 무찌르기 위해 엄지 손톱의 속살을 핀으로 찌르기도 한다. 더 잔혹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잔혹함의 결과를 선명하게 알기 위해서. 엄지 손톱 뒤의 속살에 피가 나고 부르트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진정으로 관대해지기 위해서는 잔혹한 나 자신에게까지 관대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무찌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관대함이라는 측면에서 아이들의 관대함과 어른의 관대함은 다르다. 이탈리아 신부님이 말한 enjoy life와 다온이의 총명함은 선명하게 겹치는 것이면서도, 먼 길을 돌아가서 서로 교합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