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내 장 내에 있는 코프로코커스라는 아직 그 용도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세균이 말한다.
코프로코커스: 야.. 너 서울에 사느라고 맨날 사무실 의자에 쭈구렁 하게 앉아가지고 장에 여유가 없어 여유가. 머리는 주욱 거북이처럼 숙이고 있고, 어깨는 쭈그라져서, 무릎은 쓰는지 안쓰는지도 모르게 냅두다가, 발은 맨날 신발 속에 가둬두고 사니 내가 장 안에서 증식이나 할 수 있겠어? 머리 어깨 무릎 발 말고도 너한테 중요한게 있잖아. 골반. 그 골반이 가장 많이 지탱하는게 뭐야. 우리 장이야. 근데 그 중요한 골반에 니 몸무게 전부를 다 쏟아부어서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하고 계획이나 하고 앉아있으니.. 장이 건강할 수 있겠어? 당연히 니가 속도 안좋고 그러다보니 장과 직접 연결되어있는 머리는 맨날 쓸데 없는 잡생각만 제자리에서 팽팽팽 도는거 아냐!!
유명한 동요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에는 골반이 없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지탱기반인 골반. 서울에 살던 나는 골반이 참 아픈 상태였다. 그리고 생각이 참 많았다. 건강하게 길이 뚫려있는 생각들이 아니라, 계속 똑같은 지점을 맴도는 생각들. 그리고 나는 서울에서 장이 좋지 않았는데, 언젠가 머리와 장은 직결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장이 아파 한의원을 가니 한의사분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 책 많이 읽거나, 생각 많이하시죠?” 서울에 살고 있던 내게 내 몸은 알게 모르게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다.
이제 도저히 안되겠을 때, 속도 안좋고, 머리에는 온갖 생각들이 꽉 차있고, 그래서 움직이기도 싫고 매일 누워있고 싶었을 때, 나는 대학교 때 농활의 인연으로 9년째 들리고 있었던 홍성 장곡에 홀리듯 오기로 결심했다.
#홍성 장곡면 어느 유기농 쌈채소 하우스
화학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 쌈채소를 키우고 수확하는 곳. 그래서 균이 득실득실하다. 내 장내에 있는 아직 그 용도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세균 코프로코커스는 이렇게 말한다.
코프로코커스: 그래 이거야!! 여기엔 내 친구들도 많고, 너의 눈과 귀로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겠지만, 여기야 말로 너의 몸을 치유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어.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 않아도, 아주 잠깐 니 몸이 힘들게 느낄지라도, 너가 서울 그리고 도시에서 너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강요한 고통에 비하면 이 곳은 천국이야. 앞으로 니 머리말고, 내 말을 따르도록 해. 계속 이 곳에 와서 쌈을 뜯어! 그리고 반드시, 신발과 양말은 벗고 맨발로 흙을 밟으며, 장갑은 끼지 않고 맨 손으로 쌈을 만지며, 하우스안의 균들과 직접 맞닿아 지내. 또한, 그동안 고생한 내 가장 가까운 친구 골반을 위해, 이제 너의 하중은 맨날 놀고만 있었던 너의 무릎이 지탱하도록, 무릎을 꿇고 쌈을 따는 걸 잊지마.
그리고 생각하는 나는, 하나를 더 추가했다. 정면을 보면 아래가 이중 거울로 반사되어 보이는 ‘누워서 티비를 볼 수 있는 게으름 안경’. 코프로코커스의 말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최대한 내 목과 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나의 자구책이었다. 어쩌면 나의 그 생각 덕분에, 나는 더 편안하게 쌈을 내려다 보기 위해 골반을 쓰는 쭈구려 앉기 자세보다 무릎을 꿇는 자세를 선택했고, 무릎을 꿇었을 때 실리는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발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고, 드디어 발등을 땅에 포개어 나의 하중을 더 넓게 분산시키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우스에서 쌈을 뜯은지 70여일이 지났다. 서울에서의 나의 머리 어깨 무릎 발과, 이 곳 홍성 장곡에서의 나의 머리 어깨 무릎 발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나하나 정리해보고자 한다.
발: 내 몸에서 가장 더러웠던 발은, 이제 내 몸에서 가장 깨끗한 부위가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마을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던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발을 만지작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발가락의 마디마디 눌러도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고, 발바닥과 발등은 매일매일 흙에 쓸리고 쓸리며 오히려 부드럽고 촉촉해졌다. 숙소에서 함께 사는 분이 주신 발샴푸도 한 몫 했다. 샴푸는 머리만 감는 용도인 줄 알았는데, 나는 일을 끝내고 발에 샴푸질을 한다.
무릎: 쌈 채소를 무릎을 꿇고 따기 위해 나는 16000원짜리 무릎보호대를 샀었다. 왜냐하면, 서울에 살던 내게 무릎을 꿇는 자세의 정석은 신발을 신은 상태에서, 신발이 최대한 더러워지지 않도록 발 끝으로 땅에 발을 지탱한 채, 무릎과 발가락을 지지대 삼아 하중을 지지하는 자세였기 때문이다. 하중이 많이 실리는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선 보호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뽀송뽀송해지고 있던 내 발의 발가락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다. 발가락을 곤두세우고 무릎을 꿇다보니 발가락이 계속 붓고 아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무릎을 꿇기 위해서 꼭 발가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쪼맨한 발가락들에 내 80키로 나가는 하중을 다 실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릎-발: 그래서 나는 발가락의 윗면을 땅에 포개 발가락을 눕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발등에 나있는 발가락을 연결하는 미세한 근육들이 이완을 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발등이 땅에 닿았다. 발등이 완전히 땅에 닿으니, 정강이도 땅에 완전히 닿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나는 무릎 보호대를 낀 채로 숙소에 들렸다가 깜빡하고 다시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제 무릎보호대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릎을 꿇어보았다. 그 때 나는 알았다. 진정으로 무릎 꿇는 자세는, 무릎이 땅에 닿지 않고 앞을 향해 떠있다는 것을. 이제는 무릎보호대 없이 무릎을 꿇어도, 무릎은 아플 일이 없다.
어깨: 나는 늘 왼쪽 어깨 날갯죽지에 만성적인 통증이 있었다. 그래서 홍성에 오기 직전에 ‘이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 왼손을 좀 써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오른 손으로만 쌈을 빠르게 빠르게 따던 나는, 서서히 여유를 갖고 내 왼손에게도 기회를 주기 시작했다. 오른 손으로 따다가, 왼손으로 따다가. 처음 한 이틀 정도는 왼 손으로 따는게 많이 더뎌서 마음도 급했다. 그러나 점차 왼손도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알아차린 건 사실 이미 오른손으로 쌈을 딸 때도 왼손은 오른 손이 따놓은 쌈을 가지런히 정렬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단 사실이다. 다만 내가 더 큰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 그렇게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쌈을 뜯게 되었고, 나의 몸의 회전도 더 자유로워졌다. 왼 손으로 딸 때는 왼쪽 방향의 회전이, 오른 손으로 딸 때는 오른쪽 방향의 회전이 되면서 내 양쪽 어깨는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머리: 머리는 내가 바라보는 곳을 결정한다. 나는 뻣뻣하게 허리를 세워, 게으름 안경을 낀 채, 쌈이 있는 아래만을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어깨, 무릎, 발, 무릎-발이 모두 자기 위치를 찾기 시작하자. 머리도 이제 드디어 자유를 찾은 것 같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곳은, S선생님이 개인작업할 때 같이 써도 된다며 공유해주신 컨테이너 안이다. 내가 글을 쳐다보고 있는 화면은, 내 의자의 머리받침에 거의 눕다시피 머리를 받쳐 올려다볼 수 있는 티비 화면이다. 나는 지금 글을 쓰며 위를 올려다 보고 있다. 따라서 쌈을 뜯으면서 쌈을 내려다보기 위해 머리를 숙일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내 머리 역시, 고정된 자세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그렇게 위-아래로, 끄덕-끄덕 움직이니 생각은 더 유연해지고, 유연해진 생각은 더 신속히(그것이 쉼을 향하든, 활동을 향하든) 행동으로 옮겨간다. 어쩌면 드디어, 내 머리는 장 내에 살고있는 그 목적이 뚜렷이 알려지지 않은 미세균, 코프로코커스와 하나가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